李孝相
孝相1921 ~ 1942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민족혁명당
- ·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 · 조선의용대
포상 정보
- · 애국장(1999)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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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9) 황해도 금천(金川) 출신이다. 1921년생으로 추정된다. 이명은 장문해(張文海)·이호상(李好相)이다. 1925년에 부친 이명옥(李溟玉)이 독립운동을 하던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 1926년 상하이 인성학교(仁成學校)에 입학하였다. 인성학교 재학 시 부친 외에도 김구(金九)와 이경산(李景山)의 영향으로 반일 의식을 키웠다. 인성학교를 졸업한 후 프랑스인이 경영하던 중법학당(中法學堂)에 입학하여 공부하였다. 1935년 3월 부친 이명옥이 상하이 일본영사관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자 난징(南京)으로 갔다. 15세의 나이에 난징에서 관내지역 통일전선정당으로 창립된 민족혁명당에 가입하였다. 이때 장문해(張文海)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였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발발 후 최석순(崔錫淳)·이경산·김탁(金鐸) 등 민족혁명당의 선배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상하이에 잠입하여 적정을 관찰하였다. 또한 상하이의 옛 친구들에게 난징으로 가서 독립운동에 뛰어들 것을 설득하였다. 그 후 대일전에 참전할 한인무장단체 설립을 위한 한인청년 군사교육에 참여하였다. 1937년 12월 중국 중앙군관학교 장시성(江西省) 싱즈분교(星子分校) 13기 특별6반에 입학하여 6개월에 걸친 군사훈련을 수료하였다. 1938년 10월 10일 한커우(漢口)에서 중국 관내지역 최초의 한인 무장단체인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창설에 참여하였다. 어린 나이였지만 조선의용대에서 용감한 활약상을 보여주었다. 후난성(湖南省) 북부 최전선에서 항일전쟁에 참가하는 등 활약상으로 ‘모범소년군인(模範少年軍人)’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조선의용대 창설 멤버로 참여한 후 1939년 중국공산당 계열 신사군(新四軍)에 파견되어 6개월간의 단기 군사훈련을 받았다. 그 후 조선의용대 독립분대에 배치되어 중국군 제3전구 진화(金華) 일대에서 반일공작을 전개하였다. 1941년 봄 조선의용대 총대의 명령으로 조선의용대 독립분대라는 명칭으로 이경산·이만영(李万英)·왕도(王道) 등과 함께 진화에 파견되었다. 독립분대의 분대장은 상하이 시절부터 믿고 따랐던 이경산이었다. 그 후 몇몇 대원들과 함께 상하이 공작원으로 파견되었다. 파견 목적은 상하이의 모친과 조동선을 통해 상하이에 연락거점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전 정지 작업 위에 1941년 3월 15일 분대장 이경산에게 활동자금 6백 원을 받고 진화를 출발하였다. 상하이에 도착한 후 6년 가까이 만나지 못했던 어머니를 만나 그간의 상하이 상황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상하이에서 일제에 붙잡힐 때까지 상하이의 적정 탐지, 한인들의 정황 조사, 한인들에 대한 조직 사업을 전개하였다. 특히 상하이 한인청년들을 대상으로 후방의 조선의용대에 보낼 다수의 인원을 모집하였다. 1941년 8월 상하이 프랑스공원에서 동지들과 함께 그동안 모집한 12명의 한인 청년들을 충칭(重慶)으로 보낼 방법을 상의하고 있던 중 상하이 일본영사관 중지경무부(中支警務部)에 의해 붙잡혔다. 붙잡힌 후 일제 경찰의 고문과 모친의 사망 소식에 의한 정신적 충격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9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김광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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