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元澤
鄭元澤1890. 9. 27 ~ 1971. 11. 18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종교
- · 동제사
- · 대한독립의군부
- · 대한민국 임시정부
- ·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890년 9월 27일 충청북도 음성군(陰城郡) 대소면(大所面) 옥류리(玉柳里)에서 태어났다. 호는 지산(志山)이다. 1910년 대종교의 핵심 간부였던 김교헌(金敎獻)·오기호(吳基鎬)·유근(柳瑾) 등의 권유로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였다. 1911년 12월 영남의 유학자 곽종석(郭鍾錫)에게 가르침을 청했으나 현실적인 대안을 듣지 못해 실망하였다. 이후 조소천(趙小泉)과 강석화(姜錫華)를 통해 중국의 신해혁명 당시 혁명파와 함께 행동하였던 한인들의 소식을 전해 듣고, 1912년 초 북간도(北間島) 지역으로 망명하였다가 상하이(上海)와 항저우(杭州) 지역으로 옮겨서 유학하였다. 동시에 난징(南京)과 상하이를 오가면서 신규식(申圭植)·박은식(朴殷植)·문일평(文一平) 등과 친분을 나누면서 송교인(宋敎仁)의 추도식에 참석하였고, 1912년 신규식 등이 주도한 독립운동 단체 동제사(同濟社)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14년 11월 20일 홍명희(洪命熹)·김진용(金晋鏞)·김덕진(金德鎭)과 함께 남양군도에서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한 여정을 떠났다. 샤먼(廈門)·홍콩·필리핀을 거쳐 12월 6일 보루네오 섬에 들렸다가 1915년 3월 4일 싱가포르에 도착하였다. 이후 싱가포르를 거점으로 보르네오·말레이반도·태국 등 남양 각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답사하였고, 김진용 등과 함께 고무 농장과 주석 광산에 투자하여 2,200원 상당의 자금을 확보하였다. 또한 남양 화교 사회의 경제활동을 관찰하고 현지의 영향력 있는 화교들과 교류함으로써 독립운동의 확대 가능성을 모색하였다. 1917년 12월 4일 싱가포르를 떠나 귀국하였다. 1918년 12월 20일 파리강화회의에 특사를 보내기 위해 지린(吉林)으로 가서 박찬익(朴賛翊)과 상의하여 서간도와 북간도의 독립운동가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라는 신규식의 편지를 받고,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할 사절단의 자금을 간도와 노령에서 인수하여 전달하였다. 1919년 2월 29일 지린성(吉林省) 여준(呂準)의 집에서 박찬익을 비롯하여 조소앙(趙素昂)·황상규(黃常奎) 등의 제안으로 대한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가 조직되었을 때 참여하여 선언서의 발송을 담당하였고, 이후 서무의 직책을 맡았다. 1919년 4월 20일경 조소앙(趙素昻)과 함께 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의 지원으로 상하이 공동조계에서 폭탄제조 학습소를 만들어 일단의 청년들을 훈련시켰으며 1919년 4월에 개최된 임시의정원에서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19년 5월 임시정부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신규식·조소앙 등의 지시로 김덕진과 함께 국내로 잠입하여 서울의 정두화(鄭斗和)를 찾아가 자금을 지원받기로 하였으나 귀국 도중에 일제 경찰에게 붙잡혔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김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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