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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현

全秉鉉

1878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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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전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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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남 순천(順川)임시정부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남도 순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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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서우학회
  • · 부민단
  • · 고려공산당
  • · 임시정부
  • · 동우회
  • · 정의부

포상 정보

  • · 독립장(2015)

관련 사건

  • · 국민대표회의
  • · 전만통일회의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2015) 평안남도 순천군(順川郡) 용화면(龍化面) 용화리(龍化里) 출신이다. 자료에 따르면 1878년생으로 추정된다. 이명은 왕삼덕(王三德)·전병헌(全炳憲)·김병헌(金秉憲)이다. 부친은 평양진위대 영관(領官)과 개천군수(价川郡守)를 역임한 전효순(全孝淳)이다. 어린 시절 한학을 배웠고, 부친의 부탁으로 1899년 9~10월 김구(金九)에게 교육받았다. 1901년 평남 관찰부 주사(主事)가 되었고, 1903년 충주원(中樞院) 의관(議官)에 임명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류두환(柳斗煥)·김기홍(金基弘)·김구 등과 함께 서울 상동교회에서 을사늑약 반대 상소문을 작성한 뒤 대한문 앞으로 가서 연설하였다. 1906년 7월 국민교육회(國民敎育會)에서 설립한 국민사범학교를 1회로 졸업하고, 고향 은산으로 돌아와 교사가 되었다. 이후 황해도 재령(載寧)의 양원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였으며, 평남 용강(龍岡)에서 도인권(都寅權)과 충일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계에 종사하면서 애국계몽운동을 이어갔다. 교사 활동을 하면서 1907년 서우학회(西友學會)에 참여하였다. 서우학회에서 발행한 잡지 『서우(西友)』 제2호에 「권농가(勸農歌)로 권학업(權學業)」, 제10호에 「하부유취신(賀腐儒就新)」 등의 글을 기고하였다. 이른바 ‘안악사건(安岳事件)’과 ‘105인 사건’ 이후 서간도(西間島)로 피신하여 이동녕(李東寧)·김필순(金弼淳)·이동휘(李東輝)·안창호(安昌浩) 등과 교류하면서 독립운동에 나섰다. 1913년 신흥무관학교의 외곽단체인 신흥교우단(新興校友團)의 기관지 『신흥교우보(新興校友報)』에 축사를 기고하였다. 동시에 김대락(金大洛)·김동삼(金東三) 등과 함께 경학사(耕學社)가 해체된 후 공리회(共理會)를 조직하여 서간도 지역에서 교민 자치운동에 나섰다. 공리회가 부민단(扶民團)으로 통합된 후에는 제2구 고문(顧問), 의사부장(議事部長), 교섭원(交涉員) 등의 임무를 담당하였다. 1916년 삼원포(三源浦) 만리구(萬里溝)에 설립된 정리학교(正理學校) 교장을 맡았다. 1919년 한족회(韓族會)가 조직되면서 부민단이 해체되자 한족회에서 활동하였다. 1919년 3월 중순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部) 후신으로 길림군정사(吉林軍政司)가 만들어지자 여기에 참여하였다. 이후 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만들어지자 1919년 8월 길림군정사를 대표하여 상하이로 가서 군정사의 강령과 활동 사항에 대한 보고문을 제출하였다. 9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임시정부와 서간도 지역의 독립운동 세력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였다. 같은 해 6월 김성근(金聲根)을 중심으로 임시정부 외곽단체인 구국모험단(救國冒險團)이 결성되자 참여하여 폭탄 제작 기술을 습득하였다. 1920년 5월 9일 임시정부 국무원의 지시로 서간도 특파원에 임명되어 서·북간도와 노령지역의 거류민단을 설치하기 위한 활동을 하였다. 이때 안정근(安定根)과 함께 신민단(新民團)·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광복단(光復團) 등 서·북간도 지역 독립운동단체들을 임시정부 산하로 통합시키려 노력하였다. 청산리 전투 상황을 임시정부에 보고하였으며, 중·러연합선전부(聯合宣傳部)를 조직하여 1921년 선전부 위원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1921년 초 임시정부 특파원 활동을 마치고 상하이로 돌아와 고일표(高一彪)·김창숙(金昌淑)·박은식(朴殷植) 등과 함께 「아(我) 동포에 고함」을 발표하고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촉구하면서 임시정부 개조를 주장하였다. 임시정부를 개조해야 한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임시정부를 탈퇴하고 총리를 사임한 이동휘 등과 함께 소련의 지원을 받아 조선독립공산당정부(朝鮮獨立共産黨政府)를 세우려고 시도하였다. 1921년 5월 20~23일 열린 ‘상해파 고려공산당’ 대회에 중국령 대표로 참석하였다. 1922년 10월 19일 베르흐네우친스크에서 열린 고려공산당통일대회에서 제2비서부(서간도)에 선출되었다. 이후 ‘상해파 고려공산당’ 대표 자격으로 현정건(玄正健)과 함께 국민대표회의에 참여하여 재정과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3년 6월 3일 개조파 57인과 함께 창조파의 국민위원회 조직을 반대하면서 국민대표회의를 탈퇴하였다. 코민테른(제3인터내셔널)에서 고려공산당을 별개의 독립기관이 아니라 고려부로 칭하게 됨에 따라 고려공산당에서의 활동도 중단하였다. 1923년 7월 상하이를 떠나 지린(吉林)으로 돌아왔다. 1924년 3월 전만주통일의회주비발기회(全滿州統一議會籌備發起會)가 열리자 선전원(宣傳員)으로 임명되어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1924년 2월 손정도·양기탁(梁起鐸)과 함께 동우회(同友會)를 조직하여 재만 한인의 교육진흥과 산업 및 저축을 장려하였다. 1924년 11월 전만주통일의회에서 정의부(正義府)가 만들어지면서 동우회는 정의부의 언론 활동을 보조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후 지린 지역에서 개최된 여러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였다. 1926년 12월 11일 지린 지역에서 안창호가 연사로 나선 강연에도 참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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