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배근
田培根1876. 6. 2 ~ 1938. 7. 2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중기의병(울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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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76년 6월 2일 강원도 울진군(蔚珍郡) 죽변면(竹邊面) 봉평리(鳳平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담양(潭陽). 자는 성삼(聖三), 호는 고당(高堂)이다. 아버지는 전상유(田尙濡)이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울진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에 반발하여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당시 강원도 동해 최남단의 울진(蔚珍) 지역에서도 경상도 북부지역에서 일어난 의병의 영향을 받아 의병을 일으키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에 같은 해 12월 7일 전세호(田世浩)·전매정(全梅亭)·주낙조(朱洛朝)·최경호(崔慶鎬)·김용욱(金容旭)·장진수(張鎭洙)·박병률(朴炳律) 등 여러 사람들과 함께 흥부시장(興富市場)에 모여 의병을 일으키려는 논의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06년 2월 19일 경북 청송(靑松)에서 봉기한 이현규(李顯圭)가 의병부대를 거느리고 울진으로 들어와 불영사(佛影寺)에 주둔하였다. 이때 이강년 휘하에 있었던 김현규(金顯圭)가 강원 남부의 각 군을 돌며 100명의 의병을 소모(召募)하며 1906년 2월 울진에 도착하여 합세하였다. 이현규의 부대는 이를 통해 의병부대의 전력을 보강하며 재편성하였는데, 규모가 500여 명에 이르렀다. 이후 이현규의 의병부대가 불영사를 근거지로 삼아 울진 일대에서 활동할 때 앞서 흥부시장에서 의병을 일으키려는 논의를 했던 여러 인물들과 함께 거의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1906년 4월에는 울진과 평해에 인접한 영해에서도 신돌석(申乭石)이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 항전하였다. 6월 초순 신돌석이 인솔하는 의병부대는 인근에서 활동하는 의병들과 연합하여 울진 읍내를 공격하여 군아(郡衙)와 군기고를 부수고 다수의 군기(軍器)를 확보하였는데, 이때 함께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07년 7월 고종의 강제 퇴위와 7월 31일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 조치는 의병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당시 울진지역의 과도한 결세(結稅) 수취의 폐단 문제와 당시의 정치적 상황은 울진지역에서 의병들의 활동이 활발히 나타나게 되는 하나의 요인이었다. 전국적으로 의병운동이 확산되어 가는 시점에서 8월 14일 밤 장석태·장진수 등과 함께 200여 명의 의병을 인솔하고 세무분서를 목표로 울진을 공격하여 가호를 불 지르고 세무주사를 체포하려 하였다. 이 무렵 이러한 결세문제를 주도한 울진의 여러 인사들은 신돌석의 부대에 합류하여 소모장(召募將)으로 활동하였다. 8월 26일 평해군(平海郡)에 입성한 의병부대는 평해군수 이명근(李明根)을 만나서 창의 대의를 말하여 그를 설득해 포군(砲軍) 40명과 군자금 1,000냥을 확보하며 의병의 대열을 정비하였다. 이후 울진 인근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또 다른 의병부대인 성익현(成益鉉)·정경태(鄭敬泰)의 부대에 가담하여 1907년 9월 2일 평해경무분파소(平海警務分派所)를 습격, 10월 18일 울진읍내의 경무분견소를 공격하였다. 그리고 10월 말 삼척(三陟) 읍내 일본수비대를 공격하는데 참여하여 교전 중 다리에 총상을 입었다. 이처럼 울진, 평해, 삼척 등 강원도 동남부 일대에서 활발히 활동하였지만, 이에 대한 일제 군경의 토벌 작전이 본격화되면서 점차 활동이 위축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정경태의 휘하에서 활동하던 중 1908년 9월 14일 귀순한 것으로 확인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원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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