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홍
張錫弘1875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장석홍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족장(2013)
관련 사건
- · 후기의병(장석홍 의병부대)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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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13) 충청남도 남포군(藍浦郡) 웅천면(熊川面) 광암리(廣岩里, 현 충남 보령시 웅천면 황교리) 출신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1908년 당시 34세로, 1875년생으로 추정된다. 일제의 공판기록에 양반이면서 상인(兩班商)으로 기록되어 있고, 헌병대 문서에는 역술가(易者)로 보고되어 있다. 한자가 다른 장석홍(張奭弘·張錫洪)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거주하고 있던 충남 해안지역은 해운·조운 등을 통해 서울과의 연락이 유리하고, 복잡한 해안선과 크고 작은 다수의 도서(島嶼)가 있어 게릴라 활동에 유리한 지리적 조건이 형성되어 있었다. 1907년 한일신협약으로 인한 군대해산으로 의병봉기가 촉발된 정미의병 시기에는 다양한 계층과 평민들이 주도하는 소규모의 유격부대가 활성화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소규모 의병부대를 통솔하며 활약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거병시기와 경위는 명확하지 않으나, 1908년 2월경으로 추정된다. 그가 지휘한 의병부대는 30~50여명으로 인원이 구성되어 있었으며, 서양식 소총 약 15정과 군도 및 전통도검 등으로 무장하였다. 주요 활동지역은 충남 태안군(泰安郡)·비인군(庇仁郡, 현 서천군)·서산군(瑞山郡)·덕산군(德山郡)·당진군 등이었다. 충남 도서지역 여타 의병부대와 동일하게 인근의 작은 섬들을 근거지로 하여 주로 밤에 배를 타고 상륙해 주재소 등을 공격하고, 동이 트면 철수하는 유격전술을 주로 사용하였다. 또한 김보령(金保寧)·이일봉(李日奉) 등의 부하들을 가까운 해미군(海美郡)이나 보령군(保寧郡)으로 파견하여, 군자금 및 병력 모집에 힘쓰도록 하였다. 1908년 7월 15일에는 밤 11시 부하들을 이끌고 태안군에 상륙하여 주재소 순사들과 격렬한 교전을 벌였으나 끝내 함락시키지는 못하고, 다음날 새벽 3시에 철수하였다. 그러나 일제 경찰 역시 이를 추격하는 것에 실패해 종적을 알 수가 없다고 기록하는 등 성공적인 후퇴전을 수행하였다. 1908년 8월 10일에는 의병 30여 명을 직접 인솔하고 비인군과 남포현 일대에 상륙시킨 후, 두 부대로 나누어 은밀히 군사활동을 전개하였다. 1908년 8월 13일경에는 비인군 서면(西面) 도둔리(都屯里, 현 충남 서천군 서면 도둔리)를 공격하여 군량 등을 보급하였다. 충남 도서 일대의 대규모 토벌전이 진행되던 1908년 8월경에 체포된 것으로 추정된다. 1908년 9월 23일 공주지방재판소에서 이른바 내란죄로 징역 7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구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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