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환
金啓煥1906 ~ 1930. 7. 20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단천삼림조합
포상 정보
- · 애족장(2002)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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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02) 1906년경 함경남도 단천군(端川郡) 복귀면(福貴面) 언태리(彦太里)에서 태어났다. 1930년 사망 당시 25세였다. 1926년 이후 조선총독부의 각 군 삼림조합 설립 방침에 따라, 함남은 1928년 7월 군 단위의 삼림조합(森林組合) 조직을 지시하였다. 이에 단천군은 1929년 3월 면장들이 중심이 되어 단천군 조합 설립을 발기한 후, 5월 하순부터 행정력을 동원해 각 지역의 산림 소유주들에게 조합 가입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과다한 조합비 부담에 단천군 이중면(利中面)과 복귀면 두언대리(豆彦臺里)·용연리(龍淵里), 수하면(水下面) 용원리(龍源里) 등의 산림 소유주들이 주민회의를 개최하고 집단적인 반대 운동을 시작하였다. 1929년 11월 이후 단천농민동맹과 단천청년동맹에서 군민들에게 삼림조합의 폐단과 삼림조합 반대 운동의 불가피성을 강조하면서, 1930년 3월과 5월에 개최된 이중면민대회와 복귀면민대회에서도 조합 설립 반대가 중요한 안건이 되었다. 당시 삼림은 농민들의 생활 터전이요 생계수단이었다. 특히 단천군 하다면·이중면·수하면·복귀면 주민들은 숯과 땔나무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였으므로, 산림조합 규칙에 따른 임산물 채취 금지와 조합비의 과중한 부담은 생계수단의 박탈과 같은 것이었다. 따라서 단천 군민들은 삼림조합은 물론 삼림 간수들의 행패에 대한 원성이 높았다. 이런 상황에서 1930년 7월 초 하다면 연대리에서 삼림조합 간수가 삼림 단속 중 연대리 주민 허달규를 도벌(盜伐) 혐의로 취조하려다 그 부인을 구타·감금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7월 18일 단천군 하다면 면민 200명은 삼림조합의 부당한 조치에 항의하러 면사무소를 거쳐 단천군청으로 가던 중, 일본 경찰과 대치하게 되었다. 일본 경찰이 해산을 종용하며 ‘선처하겠다’라는 말을 듣고 해산하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이 주도자 20여 명을 검거하자, 이에 분노한 면민들이 7월 19일 시위대를 조직하여 400여 명이 단천군청 앞에서 항의하다가 해산당하였다. 농민들은 다시 하다면·복귀면·파도면을 중심으로 군민대회를 개최하고, 삼림조합의 해체와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였다. 20일에는 8개 면 주민들과 함께 단청군청 앞에서 시위를 계획하였다. 1930년 7월 20일 오후 4시경 단천군 하다면·파도면·복귀면의 면민들이 중심이 된 시위대 2,000여 명이 단천군청으로 몰려가서 군수 임창재(任昶宰)에게 삼림조합 해산과 전날 검거된 면민 54명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요구가 묵살되자, 단천청년동맹 하다면 위원장 이성모(李性模)의 주도 아래 곤봉과 돌로 군청 창문과 유리창을 부쉈다. 이어 부근 경찰서로 가서 피검자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에 일제 경찰 30여 명이 시위대를 해산하려고 공포 75발을 발포하였으나 효과가 없자 실탄(實彈)을 발사하였다. 이때 최두필(崔斗弼) 등 4명과 함께 총탄을 맞고 시위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강영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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