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氣虹
趙氣虹1883. 7. 24 ~ 1945. 8. 2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민국임시정부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황종화 등 격문배포사건
- · 대구 폭탄암살음모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83년 7월 24일 경상남도 함안(咸安)에서 아버지 조성달(趙性達)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함안(咸安)이며, 호는 운영(雲影)이다. 이명으로 한자를 달리한 조기홍(趙氣紅)을 썼다. 경상북도 대구부(大邱府) 계산동(桂山洞)으로 이주하여 대장장이로 일하였다. 1919년 9월 경북 영천(永川)에서 양한위(梁漢緯)·오기수(吳麒洙) 등을 만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원조하기로 결의하고 운동자금 모집에 나섰다. 그해 12월 대구 봉산정(鳳山町)에 사는 최익무(崔翼武)가 계성학교(啓聖學校) 졸업생 이범교(李範敎)로부터 건네받은 「포고(布告) 제3호」와 동포의 단결·분기를 촉구하는 내용의 등사판 격문 「독립운동가(獨立運動歌)」와 「독립축하가(獨立祝賀歌)」 수십 장을 최익무·이종선(李鍾善)과 함께 시내 13곳의 전신주에 붙여놓았다. 이 일로 얼마 후 김우약(金禹若)과 함께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혐의를 극구 부인하고 사실을 숨겨서 불기소로 풀려났다. 이후 지속적으로 동지들과 연락을 취하며 기독교 선교지(宣敎紙)를 가장하여 『대한민보(大韓民報)』를 배포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 3월 3일 대구 견정(堅町) 이동국(李東國)의 집에서 비밀협의를 하던 중 일제 경찰의 급습으로 붙잡혔다.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송치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되어 풀려났다. 1920년 6월 하순 무렵 대구로 들어온 양한위와 대구 남문시장(南門市場)에서 만나, 선전 수단만으로는 독립의 달성이 요원하니 독립 촉성을 위해 폭탄을 갖고 한인 관리를 습격하여 처단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을 포착한 일제 경찰에 의해 6월 26일 양한위·오기수 등 동지 5명과 함께 붙잡혔으며, 자택에 숨겨둔 화약 26포와 뇌관 35개를 압수당하였다. 그해 7월 3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 등으로 징역 5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며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10월 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이후에도 독립운동을 지속하다가 1943년에도 일제 경찰에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영범⋮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