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장룡
姜張龍미상 ~ 1934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신간회 성진지회
- · 성진청년동맹
- · 성진농민조합
포상 정보
- · 애족장(199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5) 출생 연도는 불명이다.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고 사설강습소에서 공부한 후 함경북도 성진군(城津郡)의 사립 보신학교(普信學校) 고등과에 입학하였다가 중도 퇴학한 후 성진군 학동수리조합(鶴東水利組合)에 취직하였다. 학교와 직장으로 보아 함북 성진군 출신으로 추정된다. 1928년 동신청년회(東新靑年會)의 서기, 성진청년동맹(城津靑年同盟) 학동지부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29년 동신강습소(東新講習所)와 성하농민회(城下農民會)의 소장과 회장을 역임하였다. 모두 성진군 학동면(鶴東面) 성하동(城下洞)에 소재하여 연고지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1920년에 설립된 동신강습소와 성하농민회의 대표자로서 당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동신강습소의 학생은 30명, 성하농민회의 회원은 90명이었다. 1929년 12월 24일 신간회(新幹會) 성진지회의 제4회 정기대회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31년 성진농민조합(城津農民組合) 결성과 발전에 깊이 관여하였다. 3월 신간회 성진지회와 청년동맹 지부의 해소를 결의한 후 5월경 성진농민조합을 조직하였다. 합법 단체인 북성농민조합(北星農民組合)을 비합법 단체로 개혁한 중심 인물은 신간회 성진지회와 성진청년동맹의 구성원들이었다. 이들은 ‘소부르주아적 단체’인 신간회를 해소하고 청년동맹은 혁명적 농노조의 청년부로 귀속하고자 하였던 코민테른의 노선을 충실히 수행하려는 의도였다. 조직 이후 성진농민조합은 각처에 지부와 교양기관 설치 등 농조 조직 활동, 당면한 농민의 일상 이익 옹호와 획득을 통한 농민층의 경제적 이익을 보장하기 위한 활동, 반농조 세력에 대한 응징과 사회주의사상 고취 등의 정치적 활동을 전개하였다. 성진농조의 결성 이후 14개의 지부를 설치한 후 지부 밑에는 40곳의 농민조합반을 두어 농민 대중을 조직하였다. 특히 성진농민조합사건이 발발한 이후인 1932년 1월 30일에는 농민조합본부임시통제위원회(農民組合本部臨時統制委員會)와 지도위원회를 조직하여 농민조합 운동을 전개하였다. 산하에는 학성북부지부·학성남부지부·학중북부지부·학상남부지부·흥평지부·학상서부지부·학상동부지부·학상북부지부·학동북부지부·학동남부지부·학서북부지부 등을 조직하여 농민대중에 대한 지도력을 유지하였다. 성진농민조합의 학동면 남부지부와 북부지부를 조직하는 과정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1931년 11월 24일에는 학동면 한동의 소나무 숲에서 허호익(許好益)·김학걸(金鶴傑)·김운학(金雲鶴) 외 3인과 회합한 후 학동면을 남과 북의 2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지부 설치를 결정하였다. 이 회의에서 허호익 남부지부 설치의 책임자로 결정하였다. 성진농민조합의 핵심인물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조합원 2,000여 명 중 700여 명이 체포되어 오랜 조사와 예심을 거친 후 1934년 10월에서 첫 재판이 시작되었다.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77명에 달하였다. 조사 과정에서 김동응(金東應)·김일현(金一鉉)·김동춘(金東春) 등은 기소 이전에 사망했으며, 예심 중 김갑진(金甲辰)·박봉일(朴鳳日)·동시준(董時濬) 등도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조성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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