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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利世

鄭世

1911. 11. 8 ~ 1997. 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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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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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북 용천(龍川)광복군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북도 용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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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한국광복군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911년 11월 8일 평안북도 용천군(龍川郡) 양하면(楊下面) 시남동(市南洞)에서 태어났다. 1945년부터 한국광복군 3지대와 국내정진군에 참여하였다. 1940년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청사를 중국 치장(綦江)에서 충칭(重慶)으로 이전하면서 자력으로 광복군을 창설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광복군 창설에 대한 사무를 한독당(韓獨黨)에서 임시정부로 이관한 뒤 광복군을 조직하고, 중국의 승인과 원조에 대하여는 나중에 교섭을 시도하려고 하였다. 이에 따라 1940년 9월 15일 ‘한국광복군선언문(韓國光復軍宣言文)’을 발표하여 광복군의 창설을 내외에 공포하고, 17일에 한국광복군총사령부성립전례(韓國光復軍總司令部成立典禮)를 거행하였다. 총사령관으로는 이청천(李靑天), 참모장에는 이범석(李範奭)이 각각 임명되었다. 광복군은 부족한 병력을 모집하기 위해 총사령부를 충칭에서 산시성(陜西省) 시안(西安)으로 옮겼다. 시안은 화북이나 동북 방면으로 가는 전략적 요충지로 적 후방에 대한 공작 및 작전 지점으로 적합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중일전쟁 이후 많은 한인들이 화북 지방으로 이주하여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대상으로 한 초모와 선전활동을 전개하기 적합한 지역이기도 하였다. 이후 광복군은 상층조직으로 통수기관인 통수부(統帥府)와 지휘부인 총사령부(總司令部)를 두고 하부조직으로 단위부대인 4개의 지대를 편성하였다. 그러다 1941년 ‘9개준승(準繩)’ 수용 이후 광복군 총사령부의 개편과 함께 각 지대의 통합 또는 재편성이 진행되었고, 여기에 내부적으로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으로 편입되고 제5지대 지대장 나월환(羅月煥)의 암살사건 등이 발생하면서 전면적인 개편과 조정이 이루어졌다. 광복군 제3지대는 제6징모분처(徵募分處)를 기반으로 확대 편성된 지대였다. 광복군 군무부는 모병 업무를 강화하기 위해 서안에 제6징모분처를 편성하였고 1942년 산둥성(山東省)으로 파견하였다. 제6징모분처는 1942년 2월 제3지대장인 김학규(金學奎)를 주임으로 오광심(吳光心)·신송식(申松植)·김광산(金光山) 등 총 8명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전황이 바뀌면서 산둥까지는 진출하지 못하고 안후이성(安徽省) 푸양(阜陽)을 거점으로 초모 활동을 벌여나갔다. 제6징모분처에서는 3년여 동안 160여 명의 인원을 초모하였고, 이에 따라 1945년 6월 제6징모분처는 광복군 제3지대로 재편되었다. 이즈음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여, 화베이(華北)지구 지하공작대 대원으로 활동하였다. 1945년 8월 9일 일제가 포츠담선언을 수락하자 임시정부와 광복군 수뇌부에서는 국내정진군(國內挺進軍)을 편성하여 한반도로 진입시키고자 하였다. 이때 국내정진훈련을 받고 중국에 주둔하던 미군 및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팀과 함께 한반도 진입을 시도하였다. 그러던 중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광복을 맞이하였다. 1947년 8월 27일 다른 임시정부 인사들과 함께 귀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김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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