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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炳鎬

趙炳鎬

1903. 3. 23 ~ 1973.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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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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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천안(天安)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남도 천안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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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903년 3월 23일 충청남도 천원군(天原郡, 현 천안시) 동면(東面) 용두리(龍頭里)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일찍이 집안이 기독교로 개종하였기 때문에 기독교도로 활동하였고, 숙부인 조인원(趙仁元)도 용두리 감리교회의 속장이었다. 1919년 4월 1일 숙부 조인원, 유관순(柳寬順)의 부친 유중권(柳重權), 김구응(金球應)·이백하(李伯夏) 등과 함께 천안군 갈전면(葛田面) 병천리(竝川里)의 아우내장터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병천 만세운동은 서울에서 유관순과 그의 사촌언니 유예도(柳禮道)가 3월 13일 귀향하면서 시작되었다. 유관순은 3월 16일 유중권·유중무(柳重武)·조인원·김구응·이백하 등 지역의 유지 20여 명이 참석한 모임에서 당시 서울에서 전개되고 있는 만세운동 상황을 상세하게 전달하였다. 이에 이날 모임에 참석한 지역의 유지 전원이 적극적으로 찬성하여 만세운동의 준비가 시작되었다. 만세운동의 거사일은 아우내장터의 장날인 4월 1일로 결정되었다. 이때 숙부 조인원으로부터 만세운동 계획을 듣고, 곧바로 동의하여 만세시위 준비에 참여하였다. 대규모의 만세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인근 지역까지 만세운동에 대한 연락망을 조직하는 한편 매일 밤 예배당에서 유관순 등의 젊은 사람들과 함께 태극기를 제작하고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는 데 동참하였다. 수신면(修身面)과 성남면(城南面) 지역에서는 홍일선(洪鎰善)·이순구(李旬求)·김교선(金敎善) 등을 중심으로 3월 29일부터 만세운동이 준비되고 있었다. 각각 독립적으로 준비되고 있던 2개의 만세운동 계획은 김교선이 3월 29일경 김상훈(金相勳)을 찾아가 만세운동에 대해 제의했을 때, 그로부터 병천에서도 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있다는 내용을 알게 되면서 하나로 합쳐지게 되었다. 3월 31일 밤 다음날의 만세운동이 예정대로 진행될 것임을 각 지역에 알리는 신호로 매봉산을 중심으로 천안 길목, 수신면 산마루, 충청북도 진천(鎭川)의 고갯마루에 봉화를 올렸다. 이로써 만세운동의 준비는 모두 끝났다. 4월 1일 아침 만세운동에 대한 굳은 결의를 하고 집을 나섰다. 곧바로 아우내장터로 가지 않고, 만세운동 준비를 함께 한 젊은 사람들과 함께 천안 방면에서 아우내장터로 장보러 오는 주민들에게 만세운동의 계획을 알리고 함께 참가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리고 약속한 만세시위 시각이 다가오자 만세운동에 대한 홍보활동을 전개한 후 아우내장터로 이동하였다. 오후 1시경 장터의 한복판에 대형 태극기가 올라가고, 조인원이 군중의 앞으로 나와 대표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만세운동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던 많은 주민들이 이것을 신호로 품속에 감추었던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유중권·김교선 등과 함께 주민들을 지휘하여 시위대열을 형성하고 장터 일대를 행진하였다. 아우내장터에서 대규모 만세시위가 발생하자, 즉시 병천헌병주재소의 고야마(小山) 소장 등 5명의 일제 헌병이 출동하여 강제 해산을 명령하였다. 시위대가 해산에 불응하자, 일제 헌병들은 시위대를 향해 총칼을 휘둘러 김상헌(金相憲)이 사망하였다. 이에 분노한 다수의 시위대가 일제 헌병들을 쫓아가 주재소를 습격하여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고 일제 헌병을 구타하였다. 만세시위의 양상이 격렬해지자, 숙부인 조인원이 나서서 격앙된 시위대에게 비폭력 만세시위의 의미를 강조하며 시위대를 자제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 헌병들은 시위대를 향해 계속적으로 총기를 발포하고 군도를 휘둘렀다. 이로 인해 유중권이 사망하고, 유관순도 부상을 당하였다. 유중권의 시신을 업은 유중무와 조인원 등이 시위대와 함께 주재소로 들어가, 일제 헌병에게 항의하였다. 김교선, 등은 100여 명을 규합하여 주재소로 쳐들어가 유치장 벽을 부수고 구금자를 구출하였다. 분노한 주민들이 계속 주재소로 이동하여 시위대 규모는 3,000여 명으로 증가하였고, 이들과 함께 일제 헌병들에게 대항하며 공격을 계속하였다. 오후 4시경 천안에서 지원병력으로 급파된 철도엄호대원들이 아우내장터에 도착하자, 일제 헌병대는 이들과 합세하여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격을 가하고 주민들을 강제 해산시켰다. 이 과정에서 숙부 조인원과 함께 일제 헌병에 붙잡혀 천안헌병대로 연행되어 조사받은 후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소요죄로 징역 4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해 항소하였고, 같은 해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어 징역 2년 6월로 감형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그해 9월 11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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