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秉學
趙秉學1868. 1. 25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06)
관련 사건
- · 함경남도 갑산군 장평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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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06) 1868년 1월 25일 함경남도 갑산군(甲山郡) 회린면(會麟面) 화장리(化墻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3월 15일 갑산군 장평면(長平面) 시위를 주도하였다. 갑산군 장평면 만세시위는 단천군(端川郡) 천도교 인사들이 만세운동의 확산을 계획하는 과정에서 추진되었다. 3월 3일 단천군 천도교 인사들은 모처로부터 만세시위 소식과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았다. 그들은 만세시위를 단천군에 국한하지 말고 인접 지역인 갑산군으로 확산시키기로 결의하였다. 특히 갑산군에서 만세시위를 추진해야 한다는 의견은 최봉천(崔鳳天)과 서봉화(徐鳳化)가 제기하였다. 이에 단천군 천도교 인사들은 최봉천에게 갑산군으로 가서 그 지역 천도교 인사를 설득해서 만세시위를 일으킬 것을 지시하였다. 최봉천은 3월 8일 갑산군 이인면(里仁面) 가재리(加財里)의 천도교 분교실에서 김길렬(金吉烈)과 화합을 가졌다. 이어서 3월 9일에는 장평면 서부리(西部里) 천도교당(天道敎堂)과 장평면 화장리(化墻里)의 정완조(鄭完朝)를 잇달아 방문하였다. 최봉천은 갑산군 천도교 인사들과 회합에서 3월 15일 갑산군에서 천도교인들이 주도하는 만세시위를 일으킬 것을 제안하였다. 최봉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갑산군 천도교 인사들은 선뜻 만세시위를 추진하려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같은 천도교 신자였지만, 외지인에 해당하는 단천군 출신의 최봉천이 제안한 내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와중에 풍산군(豐山君) 안산면(安山面) 하지경리(下地境里)의 천도교구에서도 갑산군 천도교구에 만세시위를 권유하는 내용의 서신을 발송하였다. 풍산군 천도교 인사들로부터 서신을 받은 사람은 갑산군 천도교구의 전도사 김명수(金明洙)였다. 풍산군 천도교 인사들이 보낸 서신에는 전 민족이 궐기해야 한다는 격문과 갑산군 천도교인들도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흐름에 동참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서신을 받은 김명수는 갑산군에서도 천도교인들이 주도하는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심하였다. 3월 12일 김명수는 정수웅(鄭秀雄)과 함께 회린면 후지리(厚地里)에 거주하는 정국태(鄭國泰) 집에서 회합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김명수·정국태·정수웅은 3월 15일에 갑산군 장평면에서 천도교인들이 주도하는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 동지들을 규합하였는데, 이때 권유받고 만세시위의 참여를 결심하였다. 3월 15일 오후 2시 무렵 직접 제작한 태극기를 휴대하고 장평면 서부리의 천도교당에 도착하였다. 정수웅의 지시를 받고 천도교당에 직접 제작해서 가져온 태극기를 게양하였다. 이를 통해 장평면 만세시위의 분위기를 고양시켰다. 혹한의 추위에도 불구하고 200여 명의 시위대를 이끌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장평면 일대를 행진하였으며 일제 군경의 저지선을 뚫고 갑산군청으로 돌진하기도 하였다. 그러자 갑산군의 일제 군경은 추가 병력을 요청하였다. 이에 혜산진에 주둔해 있던 수비대가 출동해서 장평면의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일제 군경에 의해서 3월 15일 갑산군 장평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는 이유로 연행되어서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5월 2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항소하였으나, 그해 6월 2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항소를 기각하였다. 이에 “조선 민족으로서 정의(正義)·인도(人道)에 근거해서 만세시위에 참여했기에 이는 죄가 되지 않는다”면서 상고하였다. 하지만 같은 해 8월 9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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