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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在珠

鄭在珠

1886 ~ 1959. 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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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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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덕(盈德)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영덕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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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2010)

관련 사건

  • · 1919년 영덕군 창수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10)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창수면(蒼水面) 신리(新里) 출신이다. 자료에 따르면 1919년 당시 34세이므로 1886년생으로 추정된다.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촉발한 만세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소식이 경북 영덕군에도 전파되었으며 이에 따라 만세운동이 준비되었다. 영덕군 창수면에서는 3월 19일에 처음으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시위에 참가한 초기 인원은 10여 명 정도로 영해 시위에 참석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었다. 영해로 향하던 창수면의 시위대는 신기동(新基洞)을 지나면서 다른 무리들을 만나 접하고 영해 시위에 참석하는 것이 시간적으로 무리라고 판단하였다. 이에 시위장소를 창수경찰관주재소로 변경하였다. 시위대는 사람들에게 참여를 독려하던 중 신기동 구장 이현설(李鉉卨)과 협의하여 일제에 토지를 빼앗긴 동민들을 시위에 참석하도록 설득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처음 10여 명으로 시작한 시위대는 오후 4시경 200명에서 400명 정도로 늘어났다. 오후 4시경 불어난 시위대는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창수경찰관주재소로 몰려들었다. 이때 창수면 시위의 지도부인 이수각(李壽珏) 등이 호소한 만세운동 취지에 찬동하여 시위에 참여하였다. 시위대와 함께 지도부의 지휘에 따라 곤봉과 도끼 등을 들고 주재소로 들어가, 경찰의 검을 빼앗고 주재소를 점거하고자 하였다. 2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로 들어가 사무실 객사와 주임순사의 숙사(宿舍)를 파손하고 비치된 장부를 밖으로 내던졌다. 이어 시위대와 함께 마을의 오용이(吳龍伊)·이강복(李康福)·박석문(朴石文)의 집에 들어가 주임순사 다카키(高木伊三郞)의 물품과 순사보 송상구(宋相九)·권찬규(權燦奎)·김경수(金景守) 소유의 책과 물품에 손해를 입혔다. 오후 7시경에 시위대는 독립만세를 부르며 자진 해산하였다. 만세시위에 대한 처벌을 위해 일제 경찰의 검거가 이루어졌고, 이때 붙잡혔다. 1919년 7월 1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소요죄 등을 이유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다시 징역 1년을 받았다. 자신의 행위에 비하여 형의 가혹함을 호소하며 재차 상고하였지만, 그해 11월 6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홍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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