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日彰
鄭日彰1899. 8. 18 ~ 1945. 7. 4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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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99년 8월 18일 충청남도 서천군(舒川郡) 마산면(馬山面) 신장리(新場里)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3월 29일 서천군 마산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마산면에서는 기독교계 인물들이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마산면에서는 기독교 학교인 한영학교(韓英學校) 출신 송기면(宋箕勉)을 중심으로 이근호(李根浩)·임학규(林學圭)·유성열(劉性烈)·이동홍(李東洪)·노형래(盧亨來)·하중호(河重鎬)·유일동(劉一童) 등이 만세시위를 추진하였다. 협의를 통해 만세운동의 거사일을 신장리 장터의 장날인 3월 29일로 결정하고, 그동안 주민들에게 배포할 태극기의 제작과 연설의 내용을 마련하는 등 구체적으로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3월 29일 오전 11시경 만세운동의 주도자들은 시위장소로 결정한 신장리 장터로 나갔다. 장날의 신장리 장터에는 이들의 예상대로 많은 주민들이 나와 있었다. 우선 송기면과 유성렬이 태극기를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선창하고, 다른 동지들이 주민들에게 태극기의 배포를 시작하자, 송여직은 장터에 나온 주민들에게 “우리 조선이 자주 독립하여 자유를 향유하고 장래의 안락을 도모한다면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라고 준비한 내용을 연설하였다. 장날의 장터에 나왔다가 이와 같은 송여직의 연설을 듣고, 오랜만에 휘날리는 태극기를 목격하고 감격하여 곧바로 주변의 주민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동참하였다. 송기면 등의 지휘에 때라 시위대열을 갖추고 그 선두에서 장터의 곳곳을 행진하며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장날의 만세시위를 경계하고 있던 순사보 이한규(李翰圭) 등 일제 경찰이 즉각 출동하여 송기면·유성열·송여직 등 시위 주도자들을 체포하여 연행하였다. 해산하지 않고 남아있던 시위대는 연행자들을 대신하여 이근호와 나상준(羅相俊)이 지휘하였다. 이근호 등의 지휘에 따라 경찰관주재소로 달려가서 송기면 등의 석방을 요구하며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했으나, 일제 경찰은 만세시위의 즉시 해산을 명령하면서 이근호와 나상준까지 연행하였다. 이러한 일제 경찰의 폭압은 시위대를 크게 자극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른 주민들까지 자극하여 시위대의 규모는 더욱 확대되었다. 만세시위에 대한 일제 경찰의 행동에 분노한 주민들이 새롭게 대대적으로 만세시위에 참여하면서 시위대의 규모는 2,000여 명이 넘는 대규모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대규모 시위대의 위세를 배경으로 더욱 강력하게 연행자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독립만세를 외치는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 경찰은 체포자를 석방하지 않고 고압적인 자세로 만세시위의 해산을 명령하였다. 이에 이동홍·고시상(高時相)·양재흥(梁在興)·박재엽(朴在曄)·김인두(金印斗)·이승달(李承達) 등과 함께 시위대를 향해 “체포 구금된 인사들을 탈출시키기 위하여 주재소를 공격하자”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이동홍·고시상·양재흥 등과 함께 솔선하여 순사주재소 습격을 주도하였다. 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주재소를 향해 돌을 던져 창문과 유리창을 파괴하였다. 그리고 주재소 안으로 쳐들어가 책상과 의자 등 기물을 파손하고 일제 경찰들을 구타하고, 체포된 주도자 전원을 구출하였다. 만세시위를 더욱 확대시킬 생각으로 송기면·이근호·유성열 등과 함께 시위대를 이끌고 한산(韓山)을 거쳐 서천 방향으로 행진하였다. 마산면과 한산면의 경계를 통과할 즈음 직접 말을 타고 온 서천군수 권익채(權益采)의 “일제 헌병이 매복하여 있으니 해산해 달라”는 요청에 주민들의 대규모 희생을 우려하여 만세시위를 자진 해산하여 귀가하였다. 이날의 만세시위 이후 만세시위 참여자 색출을 위해 출동한 일제 경찰에 검거되어 서천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일제 경찰의 조사과정에서 만세시위 참여 및 주재소 습격을 주도한 점이 인정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5월 1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소요죄로 징역 3년을 받았다. 재판의 결과에 불복하여 항소하였다. 7월 1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 일부 내용이 취소되었으나, 동일한 죄목으로 징역 3년을 받았다. 이에 상고하였으나, 10월 19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면서 이유 없음으로 상고 기각되고 징역 3년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이후에도 일제에 대한 저항은 계속되었다. 1931년의 만주사변 이래 전선을 확대하고 있던 일제는 전쟁의 수행에서 인력 및 물자가 매우 부족하게 되었고, 이를 보충하기 위해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시행하였다. 이와 같은 일제의 수탈정책에 저항하다가 1941년 6월 23일 고등법원에서 국가총동원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다시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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