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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一性

鄭一性

1868. 6. 14 ~ 1919. 1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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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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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청양(靑陽)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남도 청양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04)

관련 사건

  • · 1919년 청양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건국포장(2004) 1868년 6월 14일 충청남도 청양군(靑陽郡) 정산면(定山面) 대박리(大朴里)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4월 5일과 6일 청양군 정산시장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5일 일어난 정산면의 만세운동은 홍범섭(洪梵燮)을 중심으로 임의재(任毅宰)·윤석희(尹錫禧)·홍세표(洪世杓)·박상종(朴商鍾) 등이 주도하였다. 임의재 등은 정산시장의 장날이었던 4월 5일 오후 3시경부터 시장에 나온 주민들에게 태극기를 배포하고, 만세시위에 참여를 호소하면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일제 헌병들은 곧바로 출동하여 만세시위의 해산 명령과 함께 시위를 주도한 30여 명을 청양헌병분견소로 강제 연행하였다. 일제 헌병이 만세시위자들을 폭행하며 야만적으로 연행하는 모습을 현장에서 목격하고, 분노를 참지 못하여 만세시위에 동참하였다. 연행된 만세시위 주도자들을 대신하여 선두에서 시위대를 이끈 정산향교(定山鄕校) 직원 권흥규(權興圭)의 지휘에 따라 독립만세를 외치며 다른 주민들과 함께 헌병분견소로 달려갔다. 헌병분견소 앞에서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며 격렬하게 만세시위를 전개하던 중 권흥규가 일제 헌병의 발포로 순국하면서 이날의 시위는 해산되었다. 다음 날인 6일 아침 일찍 전날 만세시위에 참여한 사람들과 함께 헌병분견소로 갔다. 권흥규의 친인척들과 함께 시신을 인수하여 고인의 자택이 소재한 목면(木面) 안심리(安心里)로 향하는 운구에 참여하였다. ‘배일사권공지구(排日士權公之柩)’라고 쓴 명정(銘旌)을 운구의 선두에 세우고, 행진을 시작하였다. 운구행렬이 지나는 길목마다 많은 주민들이 노제를 지내고, 통곡하며 운구에 동참해서 운구행렬의 규모는 1,000여 명의 규모로 확대되었다. 지곡리(池谷里)를 지날 즈음 운구행렬 속에서 독립만세라고 쓰인 종이 깃발의 배포와 함께 독립만세가 연창되었다. 운구행렬에서 독립만세의 구호가 외쳐지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일제는 운구행렬마저도 해산시키기 위해 정산과 공주 지역의 헌병을 급파하였다. 일제 헌병들은 권흥규의 운구행렬을 보자마자, 무차별로 발포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후 일제 헌병의 운구행렬 참여자에 대한 조사·색출과정에서 검거되어 청양헌병분견소로 연행되었다. 1919년 4월 24일의 즉결심판에서 운구 및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점이 인정되어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고 고초를 겪었다. 태형의 후유증으로 같은 해 10월 9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4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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