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룡
鄭承龍1881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11)
관련 사건
- · 양덕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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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2011) 평안남도 성천군(成川郡) 대구면(大邱面) 원평리(元坪里) 출신이다. 1919년 판결문에 39세로 기재된 것으로 보아 1881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이명으로 정승룡(鄭昇龍)을 사용하였고,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하던 만세운동 소식이 평남 성천에도 전파되어 3월 4일 평남 양덕군(陽德郡) 양덕읍(陽德邑) 읍내에서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이때 벌어진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양덕군 만세시위는 온천면(溫泉面) 상청리(上淸里)에 거주하던 천도교 양덕군 교구장 이영화(李永華)가 시작하였다. 이영화가 1919년 2월 하순, 천도교 대교구장회의(大敎區長會議)로 평양에 방문하였다가 만세운동 준비 소식을 접하고는 서울에서 발송된 독립선언서 100부를 들고 3월 1일에 양덕군으로 돌아감으로써 만세시위가 시작될 수 있었다. 거주지로 돌아가는 와중에 상룡면(上龍面)·하룡면(下龍面)·대구면(大救面)에 있는 천도교인들을 만나 양덕군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도모하였다. 이에 양덕읍내에서 큰 장이 열리는 3월 4일을 거사일로 선택하였다. 더불어 읍내의 예수교회에도 동참할 것을 제안하였다. 3월 1일부터 평양에서 시작된 만세시위가 인근 지역으로 퍼져 나가자, 양덕군의 일제 헌병대와 경찰 역시 이에 대비하고 있었다. 3월 3일 밤 12시경, 천도교 지도자들은 장터 인근에 모여 각지에서 결집한 교인들과 장꾼들을 모으기 시작하였고, 군중은 수천 명 정도가 되었다. 거사를 계획한 3월 4일 새벽 5시, 양덕면(陽德面) 상석리(上石里) 천도교구당 앞에서 독립선포식이 개최되었고, 군중들과 함께 행진하기 시작하였다. 일제 헌병대의 갑작스런 사격에 흥분한 군중들은 헌병분견소를 습격하는 등 물리적인 충돌이 이어졌다. 이 시위에서 사상자 20여 명, 중경상자 50여 명이 발생하였다. 시위대 중 70여 명은 현장에서 체포되었는데, 이때 경찰에 의해 붙잡혔다. 1919년 6월 17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조선 민족이 만세를 부르는 것은 어떤 법에도 저촉되지 않는다”는 취지로 상고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8월 28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윤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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