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광순
鄭光淳1880. 7. 9 ~ 1961. 5. 9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대구 서문시장(3.8)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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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80년 7월 9일 경상북도 대구(大邱)에서 태어났다. 대구 기독교청년회에서 이만집(李萬集)·김태련(金兌鍊)·백남채(白南埰)·최경학(崔敬學)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18년에는 부회장(副會長)을 맡았으며, 이후 사교부장·설비부장·서기 등을 역임하였다. 제중원(濟衆院)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으며, 의사면허를 소지하여 당시에 의원을 경영하였다. 1919년 3월 8일 대구의 만세운동을 준비하는 과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3월 1일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가운데, 이만집(李萬集)은 이갑성(李甲成)으로부터 독립선언서와 취지서를 수령하여 대구지역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정하였다. 만세운동의 계획 과정에서 기독교 계열의 김태련과 계성학교(啓聖學校) 교사 김영서(金永瑞)가 먼저 동지로 결합한 후 백남채·최상원(崔相元)·권의윤(權義允)·최경학 등과 함께 만세운동의 계획과 실행에 참여하게 되었다. 만세운동의 준비과정에서 이만집·김태련·정재순과 함께 기독교 교도를 중심으로 만세운동의 참가를 독려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만세운동의 대표자를 선정하는 과정에 관여하기도 하여 경성에서 행해지는 만세운동의 방법에 따라서 참여자 중에서 대표자를 뽑자는 의견을 전달하였다. 대표자가 운동의 전 책임을 지고 관청의 조사를 받도록 하자는 의견이었다. 대표자는 총 6명을 선정하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김무생(金武生)·최상원·김영서 등과 함께 만세운동의 대표자로 선정된 사람들에게 서약서의 날인을 받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와 같은 만세운동 준비의 주도적인 활동으로 붙잡혀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최경학·박제원(朴齊元)·이태학(李泰鶴)·권의윤과 함께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함에 5월 31일 대구복심법원으로부터 만세시위에 참여를 권유하거나 만세운동에 참여했다는 사실에 대한 증빙이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로, 원판결을 취소되고 무죄를 받았다. 이후 1923년 1월 대구 최초의 개신교 교회이자 이만집이 담임목사였던 남성정교회에서 장로 안수를 받았다. 그러나 소속된 경북노회 측과 분쟁이 생기면서 대구 중앙교회를 별도로 건립하는데 참여하였다. 1926년 1월 서자명(徐子明)과 함께 중앙교회의 장로로 취임하였다. 한편, 남성정교회에서 운영 중이었던 대남유치원이 중앙교회로 이전하게 되면서 초대 원장을 맡기도 했고, 여성교육을 위해 여자학원 설립에 대표로 인가를 신청하기도 하였다. 이후 토목공려회를 설립하거나, 대구 시민대회의 구제위원·조선노동공제회 대구지회 의사원에 선출되었다. 특히 조선노동공제회는 1919년 만세운동 이후 나타난 전국적인 노동단체로서, 노동을 사회의 근본으로 설정하고 노동문제 해결을 위해 조직과 제도를 개선하기 위한 단체였다. 이외에도 대구 YMCA에도 참여하는 등 대구 지역에서 다방면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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