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창오
田昌五1869. 11. 28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06)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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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06) 1869년 11월 28일 황해도 수안군(遂安郡) 수안면(遂安面) 자의리(慈儀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3일 수안읍 시위에 참여하였으며,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을 비롯해서 북부지역 7개 도시에서 만세운동이 일제히 일어났다. 만세시위의 전국적 확산을 목적으로 천도교 중앙총부는 각 지역의 천도교구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하였다. 그 일환으로 천도교 중앙총부의 월보과장(月報課長) 이종일(李鍾一)은 황해도 곡산군(谷山郡)에 거주하는 이경섭(李景燮)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하였다. 3월 1일 저녁 수안면 석교리(石橋里)의 수안천도교구(遂安天道敎區)는 이경섭의 방문을 받았다. 그는 수안천도교구장 안봉하(安鳳河)를 비롯한 관내 천도교 인사들에게 독립선언서 70장을 전달하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권유하였다. 3월 2일 평소 독립을 희망하였던 안봉하와 천도교 인사들이 수안천도교구에 모였다. 그들은 3월 3일에 수안읍 일대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런데 그날 오후 3시 경에 수안헌병분대 소속 헌병들이 수안천도교구실을 급습하였다. 그들은 황해도 경무부장으로부터 독립선언서의 전국적 배포 단서를 확보하기 위해서 수안천도교구실의 수색을 명령받은 상태였다. 일제 헌병은 수안천도교구실에서 독립선언서를 압수하고, 현장에 있었던 천도교 인사들을 구금하였다. 일제 헌병의 연행을 피한 이영철(李永喆)·홍석정(洪錫禎)·한청일(韓靑一)은 3월 3일에 수안 일대에서 만세운동을 변함없이 진행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들은 수안군의 천도교인들에게 만세시위 참여를 독려하였다. 이때 권유를 받고 만세시위에 참여하기로 결심하였다. 3월 3일 새벽 6시부터 수안읍 만세시위가 본격화되었다. 이영철·한청일·홍석정은 수안읍에 모인 130~140여 명의 시위대를 이끌고 조선 독립을 외치면서 수안읍 일대를 행진하였다. 이영철은 수안금융조합 앞에서 독립을 선언하는 연설을 하였다. 시위대는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수안헌병분대에 이르렀다. 그들은 헌병분대의 퇴거를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오전 11시 경 이동욱(李東郁)과 오관옥(吳觀玉)이 이끄는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100여 명이 참여한 시위대의 일원으로 조선 독립을 외치면서 수안헌병분대로 행진하였다. 시위대와 함께 조선의 독립에 따른 헌병분대의 즉각 퇴거를 외쳤으며, 시위대 일부가 헌병분대 경내로 진입하였다. 그러자 일제 헌병은 시위대를 향해 일제 사격을 하였다. 일제 헌병의 총격 소식이 전해지자, 홍석정, 한청일, 오관옥은 오후 1시 경에 시위대를 다시 조직하였다. 150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그들은 조선 독립을 외치면서 수안헌병분대로 진출하였다. 시위대는 조선 독립과 헌병분대 퇴거를 외치면서, 수안헌병분대의 경내로 진입하였다. 시위대 중에서 양석두(梁石斗)·김희덕(金熙德)·이치제(李致濟)·오병선(吳炳善) 등은 경내에서 조선 독립과 헌병분대 퇴거를 강경하게 요구하였다. 시위대가 경내에 진입하자, 일제 헌병은 일제히 사격하였다. 일제의 발포로 홍석정과 한청일은 현장에서 즉사하였으며, 총상을 입은 오관옥도 사망하였다. 일제는 3월 4일부터 수안군 일대에 병력을 증파하여 시위의 확산을 차단하는 동시에 수안읍 만세시위에 참여한 인사들을 색출하였다. 그 과정에서 일제에게 연행되어 내란죄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 결정으로 관할재판소로 경성지방법원이 지정되었으나 8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항소를 수리하지 않았다. 같은 해 1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소요죄로 징역 1년 3월(미결구류일수 중 450일 본형 산입)을 받았다. 이후의 행적은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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