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창대
全昌大1892. 10. 7 ~ 1932. 9. 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은율군 장련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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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92년 10월 7일 황해도 은율군(殷栗郡) 장련면(長連面) 동부리(東部里)에서 태어났다. 유복한 가정 환경으로 아버지는 평창군수를 역임했으며, 친형은 경찰의 요직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19년 3월 12일 은율군 장련 장터 시위를 주도하였다.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의 만세운동은 3월 초순부터 개신교 인사들과 청년,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일도면 누리(樓里) 예수교회의 임국승(林國承), 장련읍 예수교 교회 소속의 유원식(柳元植)은 박경준(朴景俊)·오윤화(吳允和)·최태영(崔泰永)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동시에 그들은 정련면 일대의 개신교 교회에 연락해서 독립만세 참여를 독려하였다. 동부리(東部里)에 사는 김일영(金一泳)은 학생 10여 명과 함께 읍내에 거주하는 김처곤(金處坤) 집에서 태극기 8장을 제작하였다. ‘대한국 만만세’, ‘우리 동포는 독립권을 획득했다’ 등의 글을 국기 여백에 적은 후 읍내 게시판, 장련보통학교 교문 앞을 비롯해서 읍내 곳곳에 태극기를 부착하였다. 한편 3월 8일 사립 숭실학교 교사 김창덕(金昌德)은 동부리 청년 유원식(柳元植)으로부터 독립선언서 등사 인쇄를 부탁받았다. 이에 김창덕은 3월 10일 오전 9시 경에 유원식에게 독립선언서 인쇄본을 전달해 주었다. 3월 11일 개신교 학생들은 장련면에서 독립선언서를 사람들에게 배포하다가 일제 관헌들에게 압수당하였다. 만세시위를 위한 사전 움직임이 속에 3월 12일 장련면에서는 본격적으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3월 12일 장련 장터에서 열린 만세시위를 적극적으로 주도하였다. 일도면(一道面)·이도면(二道面) 주민들도 장련 장터의 만세시위에 합세함으로써, 시위대에 참여한 인원들은 3,000여 명에 이르렀다. 시위대 선두에 서서 본인이 직접 제작한 태극기를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위행진을 이끌었다. 일도면(一道面) 누리(樓里)에 거주하는 사립 진명학교 교사 임창연(林昌椽)과 장련면 화천리(花川里)에 하는 사립학교 교사 정재염(鄭在炎)도 시위대 선두에 서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장련면 헌병대로는 진압이 어려웠던 관계로 송화읍 헌병대와 합세해서 만세시위를 강경하게 진압하였다. 오후 2시 무렵 일제 관헌은 19명의 주도자를 연행하였으며, 그 이후로도 대규모 색출 작업을 통해서 총 47명을 연행하였다. 일제 군경에 의해서 장련면 만세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붙잡혀서 재판에 회부되었다. 법원에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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