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진백
全鎭伯1879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08)
관련 사건
- · 1919년 성천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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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2008) 평안남도 성천군(成川郡) 통선면(通仙面) 용담리(龍潭里) 출신이다. 자료에 따르면 1919년 당시 41세로 1879년생으로 추정된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3월 4일 평안남도 성천군 읍내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평안남도 성천군의 만세운동은 비교적 초창기에 일어났다. 2월 말 평양에서는 천도교 대교구장회의가 개최되었다. 천도교 성천교구장이었던 이돈하(李燉夏)도 여기에 참석하였는데, 이때 이돈하가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서를 입수하였다. 이돈하는 이를 성천군으로 가지고 온 다음, 3월 4일에 성천 읍내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정하고 천도교도를 조직적으로 규합하였다. 3월 4일 아침 10시, 성천 읍내에는 사전에 연락을 받은 수백여 명의 천도교도들이 모여 들었다. 이들은 미리 준비된 독립선언서를 시민들에게 배부하는 한편, 독립의 의미를 전파하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을 시작하였다. 한국병합 이후 본국(本國) 회복의 정신과 사상을 가지고 독립을 희망해 오던 중, 사람들이 ‘독립만세’를 외치는 것에 고무되어 함께 ‘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곧 시위대는 읍내 상부리(上部里) 동명관(東明舘) 앞에 위치한 헌병분대(憲兵分隊)에 도달하였다. 석달억(石達億) 등을 위시한 일부 시위대가 먼저 헌병분대에 돌입하여 유리창을 부수고 집기를 파괴할 때, 함께 돌입하여 ‘만세’를 외치고 시위를 계속하였다. 이에 일제 헌병들은 시위대에게 실탄을 발사하였고, 그 과정에서 30여 명의 시위대가 사망하고, 30여 명이 부상당하였다. 이어 일제 헌병들은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체포하기 시작하여 약 400여 명의 시위대를 체포하였는데, 이 때 일제 헌병에게 붙잡혀서 조사를 받고 재판에 넘겨졌다. 평양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919년 7월 3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을 받았다. 다시 “인민의 도리는 국가에 있다. 인자(人子)의 의(義)는 아버지에게 있다. 그러므로 만세를 부름은 죄가 아니라고 믿는다”라고 상고 취의를 밝히며 상고하였으나, 1919년 9월 18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윤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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