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철
全聖哲1894. 10. 4 ~ 1950. 9. 14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건국포장(1992)
관련 사건
- · 1919년 안동군 풍산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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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포장(1992) 1894년 10월 4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서후면(西後面) 명리(鳴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24일 안동군 풍산면(豐山面) 풍산장터에서 전개된 만세시위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을 비롯한 7개 도시에서 만세운동이 일제히 일어났다. 안동군 만세시위는 일본 도쿄(東京)와 서울에서 유학중이던 학생들의 귀향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계획되었다. 도쿄 유학생 강대극(姜大極)은 안동군청 서기 김원진(金元鎭)에게 도쿄 유학생의 독립선언과 각 지역에서 전개된 만세운동 소식을 전하면서 안동에서의 만세시위 추진을 권유하였다. 김원진은 김영옥(金泳玉)·이중희(李重熙)를 만나서 안동에서의 만세시위를 논의하였고, 그 과정에서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재학중인 김재명(金在明) 등이 합류하였다. 하지만 일제 군경에게 거사계획이 사전에 발각되면서 3월 13일로 계획된 만세시위는 무산되었다. 하지만 3월 13일 이상룡(李相龍)의 동생인 이상동(李相東)은 안동군 읍내 시장안의 도로에서 단독으로 만세를 외쳤다. 3월 18일에는 개신교 인사들과 유림 30여 명이 모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펼쳤다. 이날의 만세시위는 새벽 1시까지 계속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시위대는 일제 군경을 향해 투석전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3월 23일에는 안동 일대에서 3,000여 명이 참여해 아침 7시 30분경 만세시위를 시작하였고, 시위대는 안동경찰서와 안동지청 등을 공격하며 이전 시위에서 연행된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시위대가 경찰서와 안동지청으로 들어가자 일제 군경과 안동 거주 일본인들로 구성된 자위대는 발포하는 등 강경진압을 시도하였다. 3월 23일 김후성(金後性)·권영헌(權寧憲) 등과 함께 3월 24일 안동군 풍산면 풍산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3월 24일 오후 미리 계획한 대로 풍산장터에서 사람들이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자, 김후성과 함께 동참하였다. 이때 김후성이 태극기를 손에 들고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자, 30여 명의 사람들과 더불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행진하였다. 이 일로 붙잡혀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해 항소하였고, 같은 해 5월 12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었지만 다시 징역 10월을 받았다. 재차 상고하였지만, 그해 6월 14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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