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두관
張斗爟1900. 9. 23 ~ 1958. 10. 1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청산리전투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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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900년 9월 23일 경상남도 진주(晋州)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는 장두관(張斗觀·張斗鑵)·장두남(張斗南)·장두권(張斗權)이 있다. 1915년에서 1920년 사이에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였다. 1920년 홍범도(洪範圖)의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이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직속 국민회군(國民會軍)과 연합부대를 편성할 때 홍범도가 지휘하던 정일제일군(征日第一軍)의 소대장으로 청산리전투에 참여하였다. 1921년 3월 독립군부대와 함께 자유시에 도착한 것으로 보이며, 같은 해 6월 자유시참변을 겪었다. 그 후 오하묵(吳夏默)·지청천(池靑天)·최진동(崔振東)·홍범도 등이 이르쿠츠크에 설립한 고려혁명군관학교(高麗革命軍官學校)에 입학해 전문적인 군사훈련과 정치훈련을 받았다. 고려혁명군관학교는 1921년 10월 28일 고려혁명군 군사간부 양성을 위해 설치된 기관이었다. 그러나 1922년 초 지청천 등의 체포로 인해 고려혁명군관학교도 같은 해 8월 해체되었다. 1924년부터 국내로 들어와 고향인 진주를 중심으로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1924년 8월 진주금융조합에서 근무하던 박춘성(朴春星)이 조합 몰래 인출한 조합비 6,000원 중 일부를 군자금으로 전달받아 만주로 가려던 도중 서울에서 진주경찰서 서원(署員)들에게 붙잡혔다. 8월 9일 진주경찰서로 압송되었다. 이 일로 조사를 받고 같은 해 9월 진주지청에서 열린 공판에서 징역 1년 6월을 받아 옥고를 겪었다. 1926년 진주청년회(晋州靑年會) 운동부 위원, 진주노동공제회(晋州勞動共濟會) 집행위원 등이 되었으며, 1928년 3월 진주지역 사회운동자의 생활난 구제를 목적으로 조직된 진주제난회(晋州濟難會) 위원장이 되었다. 같은 해 8월 진주노동연맹(晋州勞働聯盟) 책임상임간사에 선임되었다. 1929년 2월 진주노동연맹에서 원산노동연합회(元山勞動聯合會)에 원산노동쟁의와 관련한 격려문을 발송했다는 이유로 진주경찰서에 붙잡혀 구류 20일 처분을 받았다. 같은 해 6월 개최된 진주노동연맹 7주년기념식에서 위원장에 당선되었으며, 7월 신간회 진주지회 정기대회 준비위원이 되었다. 8월 신간회 진주지회 집행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신간회는 1927년 2월 15일 창립되어 1931년 5월 16일 해소될 때까지 민족의 좌우합작에 의해 국내 민족협동전선의 최고기관으로 활동하였다. 진주에서는 1927년 10월 19일 진주청년회관에서 열린 설립대회를 통해 조직되었다. 광복 후 국내 건군운동에 참여하였는데, 1945년 11월 대한국군준비위원회(大韓國軍準備委員會) 산하 대한국군준비총사령부(大韓國軍準備總司令部) 헌무부장(憲務部長)에 임명되었다. 대한국군준비총사령부는 한국광복군 국내지대의 모체가 된 조직으로, 1945년 11월 5일 오광선의 귀국 후 광복군 국내지대로 개편되었다. 1946년 1월 14일 미군정의 사설군사단체 해산령에 의해 광복군 국내지대가 해체되자, 오광선이 조직한 광복청년회에 훈련부장으로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43개 청년단체들이 연합하여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총연맹(大韓獨立促成全國靑年總聯盟)을 결성하자 윤익헌(尹益憲)·이창준(李昌俊)과 함께 광복청년회 대표로 참여하였다. 1947년 육군사관학교 특별3기로 졸업하였으며, 1950년 6·25전쟁에 참전하고 1953년 9월 육군 대령으로 예편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정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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