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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學弼

學弼

1897. 3. 23 ~ 1936. 7.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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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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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북 영변(寧邊)만주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북도 영변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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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광복군총영결사대

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선천투탄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1) 1897년 3월 23일 평안북도 영변군(寧邊郡) 팔원면(八院面) 명당리(明堂里)에서 태어났다. 본적은 평북 영변군 팔원면 천양동(天陽洞)이다. 만주로 이주하여 펑톈성(奉天省) 푸쑹현(撫松縣)에 거주하였다. 이명은 김원대(金元大)·이태화(李泰和)·김수호(金水湖)이다. 1920년 미국의원단의 한국 방문을 기회로 계획한 의거에 참여하였다. 1920년 8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미국의원단 일행의 한국 방문을 기회로 콴뎬현(寬甸縣)의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을 국내에 파견하기로 하였다. 이 계획에 광복군총영 결사대로 선발되어 서울·평양(平壤)·선천(宣川)·의주(義州) 등으로 파견되었다. 이때 김응식(金應植)·임용일(林龍日)과 함께 선천으로 파견되었다. 1920년 8월 21일 선천에 도착한 후 동지들과 함께 선천역과 선천경찰서에 폭탄을 던질 것을 계획하였다. 신성중학(信聖中學) 재학생 박치의(朴致毅), 삼봉교회(三峰敎會) 장로 박치조(朴治祚), 기독교 목사 백시찬(白時瓚)과 박세건(朴世健)·김석창(金錫昌) 등이 계획에 동의하였다. 이에 무기를 국내로 들여오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 광복군총영 본영으로 갔다. 미국의원단 방문을 계기로 국경 감시가 강화되자 8월 30일 권총 1정, 소총 1정, 폭탄 등을 가지고 국내로 다시 돌아갈 수 없었기 때문에 계획대로 의거를 일으킬 수 없었다. 또한 이미 미국의원단이 선천을 지나간 후였기 때문에 의거일과 대상을 변경하여, 다이쇼(大正)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을 의거일로 정하고, 선천군청과 선천경찰서로 의거 대상으로 변경하여 두 기관을 파괴하고 「최급경고문(最急警告文)」과 격문을 나눠주기로 하였다. 1920년 9월 1일 새벽 3시경 선천경찰서로 박치의와 함께 갔다. 박치의가 폭탄을 던질 때 망을 봐 주고, 선천경찰서가 폭파되자 준비한 「최급경고문」과 격문을 주변에 뿌린 뒤 현장을 빠져나갔다. 이 일로 1920년 9월 7일 신성중학 기숙사에서 박치의·김응식·임용일과 함께 붙잡혔다. 경찰서 유치장에서 탈출하여 평양으로 파견된 광복군총영 대원들과 합류하기 위하여 철산군(鐵山郡) 운산면(雲山面) 근천동(根川洞)으로 몸을 피하였다. 1921년 6월 숭의단(崇義團) 장익부(張益富)를 통해 안둥현(安東縣)으로 복귀한 후, 지린(吉林)·헤이룽장성(黑龍江省)에서 교육 사업에 참여하였다. 1934년 10월 14일 중국 창춘(長春)에서 일본군 장교를 처단한 일로 일제 경찰에 다시 붙잡혔다. 국내로 끌려와 신의주지방법원과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7년을 받았다.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겪던 중 1936년 7월 26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국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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