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性吉
趙性吉1860. 10. 1 ~ 1917. 9. 18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청송의병부대
- · 산남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전기의병(청송의병부대)
- · 후기의병(산남의병부대)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60년 10월 1일 경상북도 청송군(靑松郡) 현동면(縣東面) 인지리(印支里)에서 아버지 조민호(趙旼祜)와 어머니 경주김씨(慶州金氏)의 4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함안(咸安)이며, 자는 태초(太初), 호는 백운(白雲)이다. 정절공(貞節公) 어계(漁溪) 조려(趙旅)의 후예이다. 1896년 3월 16일 청송의병부대의 창의를 주도하였다. 창의를 독려하는 격문(檄文)을 발하고, 3월 10일 청송향교의 향원 1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창의를 결의하였다. 3월 16일에는 심성지(沈誠之)를 창의장으로 추대한 후, 의병부대를 일으켰다. 5월 14일 청송의병부대를 비롯한 의성의병부대와 이천의병부대가 연합하여 결성한 의성연합의병부대의 감은리전투(甘隱里戰鬪)에 참여하였다. 각군도지휘사(各軍都指揮使)로서 중군장 김대락(金大洛), 진무장 정진도(鄭鎭燾), 소모 심능장(沈能璋), 참모 오세로(吳世魯), 서기 윤도혁(尹道爀), 외방장 안병룡(安秉龍), 군사 이경식(李景植), 집사 윤경승(尹景昇) 등과 함께 포정 60명을 거느리고 출정하여 관군 7~8명을 처단하는 전과를 올렸다. 감은리전투 이후 6월 18일 경주연합의병부대의 경주성전투(慶州城戰鬪), 7월 14일 영덕연합의병부대의 영덕전투(盈德戰鬪)에 참여하는 등의 활동을 이어나갔다. 7월 16일 청송으로 귀향하여 청운(靑雲)에 주둔하고 있던 중, 영덕에서 패퇴하여 부남면(府南面) 화장동(花場洞)으로 들어와 진을 치고 있던 이천의병부대가 7월 20일 관군의 공격을 받고 크게 패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청송의병부대를 이끌고 이천의병부대를 지원하기 위해 청운에서 화장동으로 행군하였다. 그러나 부동면(府東面) 상평(上坪)의 화전등(花田嶝)에 이르러 관군의 기습을 받고 6명의 전사자를 남긴 채 패하고 말았다. 그 후 관군의 추격을 받으며 각처를 전전하다가 은거하였다. 1906년 3월 창의한 산남의병부대를 후원하였다. 서종락(徐鍾洛)·남석인(南錫仁)·남석우(南錫佑) 등과 함께 산남의병부대에 참여하고자 하였으나 상중(喪中)이었으므로 참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청조문(請助文)을 각지에 발송하여 의병을 소집하는 등 간접적으로 후원하였다. 1909년 이후 청송향교의 직원(直員)을 역임하였다. 1912년 「여총독장서(與總督長書)」를 발표하여 일제의 한국병합과 식민통치의 부당성을 지적하였다. 1914년 일제가 주는 한국병탄기념장을 거부하는 「한국합병기념장불수리서(韓國合倂記念章不受理書)」를 발표하였다. 저서로는 『백운시집(白雲詩集)』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권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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