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장충식

張忠植

1836. 11. 9 ~ 1901. 8. 16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장충식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충북 단양(丹陽)의병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북도 단양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지평 의병부대
  • · 유인석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족장(1992)

관련 사건

  • · 전기의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2) 1836년 11월 9일 충청북도 단양군(丹陽郡) 대강면(大崗面) 기촌리(基村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인동(仁同)이며, 자는 사이(事以)이고, 호는 열은(洌隱)이다. 「행장」에 14세 때 가세가 빈곤하여 어머니의 병환을 치유하기 위해 직접 채집 활동을 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집안 형편이 계속 유복한 편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충북 단양군·제천군(堤川郡) 등은 강원도 춘천군(春川郡)·영월군(寧越郡)·원주군(原州郡), 경기도 지평군(砥平郡)·양근군(楊根郡) 등과 한강 상류를 중심으로 생활권역이 연결되어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화서학파(華西學派)의 광범위한 학문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있었다. 화서학파에 속하지 않았지만 지역 유림의 대표로 이들과 교류하였고, 아들인 장익환(張益煥)은 화서학파의 대학자인 이근원(李根元)에게 사숙하는 등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또한 문장에 힘을 쏟고 민겸호(閔謙鎬)·민영환(閔泳煥) 등의 문객으로 중앙 정계의 주요 인사들과도 친목을 도모하였다. 조정에서 1886년 선공감 감역(繕工監 監役), 1888년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 등을 제수하였으나, 양친의 병을 이유로 사양하고 향리에서 계속 은거하였다. 1894~1895년경 단양에 동학농민운동의 여파가 미치자, 격문을 돌려 민병을 모집하고 지역 내 동학농민군의 진압에도 참여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이 발생하여 일본의 침략 야욕이 두드러지고 단발령이 시행되어 기존 유교 질서와 전통 풍속에 대한 위협이 가시화되자, 화서학파를 비롯한 유림은 물론 국민적 분노가 고조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 크게 탄식하며 의병 거병의 격문을 초안하고 이를 유인석(柳麟錫)에게 먼저 보인 후 약조하였다. 그리고 지평군의 이춘영(李春永)과 안승우(安承禹), 단양의 서상렬(徐相烈)과 이필희(李弼煕) 등에게도 발부하여 거병을 격려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896년 1월 12일 원주 지정면 안창리에서 지평의진을 일어나자, 60대의 노구를 이끌고 달려가 참모로 참전하였다. 지평의진이 장회협(長滙峽) 전투에서 승전을 거둔 후 흩어지자, 서상렬·이필근 등의 지도부와 함께 경상북도 순흥군(順興郡)·충북 영춘군(永春郡)·강원도 영월군 등을 전전하였다. 같은 해 2월 3일 강원도 영월군에서 유인석이 이들의 추대를 받아 제자들을 규합하고 세를 모아 호좌의진(湖左義陣)을 일으키자, 격문 통지 등의 선전과 연락은 물론 인물의 접대·접촉 등을 담당하는 사객(司客)으로 임명되었다. 이는 화서학파 등을 포함해 지역에서 상당한 인물들과 교류하였고, 간부진 내에서 가장 연장자로서 존중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이때 의병부대 내에서 “그의 뜻에 어긋나는 논의를 가지고 있어도 눈치를 보거나 혹은 지켜보기만 하여, 그의 말 한마디에 일절 복종하였다.”라고 할 정도로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공은 군영의 사무에 시종 진심을 다하여, 사방으로 오는 사람들의 응접을 관장하였고, 그 중에 쓸 만한 사람은 거두어 추천하였다.”라고 평가받을 정도로 단순한 연락·접대 뿐만 아니라 외부 인재 선발과 인사 추천의 중요 업무를 주도하고 있었다. 한편 아들인 장익환도 단양 방면의 수비책임자로 임명되어, 지역에서 군사를 소모(召募)하고 군자금을 조달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1896년 2월 16일 충주성 공략에 가담하였고, 계속해서 군무를 맡아서 진행하였다. 그러면서 의병부대가 급행하여 충주에 머물지 말고 서쪽으로 바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 충주에 머물던 의병부대는 인근에서 일본군과 소모전을 벌이다가 3월 5일 충주성에서 퇴각하였다. 이후 10개조의 방략 제시를 통해 단발령 문제 등 유교적 풍습보다는 먼저 왕비 시해라는 국가적 설치(雪恥) 강조·통수권의 통일·조선 중앙군(王師)과의 전투회피 타파, 근거지의 이동 등의 전략 수정을 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울화병으로 군무를 볼 수 없을 정도였다. 같은 해 4월경 의병부대가 관군과의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고 5월 하순 제천성을 포기하였다. 이후 유인석이 서쪽으로 향하여 중국으로 들어갈 계획을 세우자, 아들 장익환과 함께 영월로 돌아갔다. 귀향한 이후에는 일제 군경과 관인의 핍박을 받았으나 굴하지 않았다. 특히 왕비가 시해당해 거상의 기간이 끝났지만, 그 범인인 일본군을 토벌하지 못하였다며 흰 상복(白衣冠)을 고수하였다. 또한 만주로 이동한 유인석과도 계속해서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은신생활을 하면서 국세가 기울어지는 것을 분개하다가 1901년 8월 16일 사망하였다. 아들 장익환은 다시 원용팔(元容八) 의병부대에 가담해 활동하였고, 국채보상운동에도 참여하며 부친의 유지를 이어갔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구열회⋮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