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호
張俊灝1888. 1. 15 ~ 1930. 9. 17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산남 의병부대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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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88년 1월 15일 경상북도 칠곡군(漆谷郡) 가산면(架山面) 학산리(鶴山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인동(仁同)이고, 자는 경팔(景八)이며, 호는 회산(回山)이다. 양자로 입적하여 아버지는 장희태(張希泰)이고, 어머니는 덕수이씨(德水李氏)와 벽진이씨(碧珍李氏)이다. 생부는 선전관(宣傳官)을 지낸 운헌(雲軒) 장희학(張希鶴)이고, 생모는 김해김씨(金海金氏) 김태석(金台錫)의 딸이다. 1906년 4월 경북 영천(永川)에서 산남 의병부대가 결성되자, 18세의 나이로 같은 칠곡 출신의 장성우(張性愚)·손기찬(孫基瓚)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1906년 4월 산남의병부대의 창의장 정용기(鄭鏞基)가 체포된 뒤, 임용상(林龍相) 부대의 참모(參謀)로 활동하였다. 1907년 4월 정용기가 재기하여 진용을 재편성할 때 상영집사(上營執事)에 임명되었다. 1907년 10월 7일 정용기가 입암전투(立巖戰鬪)에서 전사한 뒤, 1907년 9월 그의 부친 정환직(鄭煥直)이 총대장에 취임하여 13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하기 위해 북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장성우 등과 함께 인동·칠곡 지역으로 파견되어 군사와 무기를 모집하였다. 인동·칠곡 지역에서 탄약 제조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1907년 12월 정환직이 체포·사망한 뒤 최세윤(崔世允)이 이끌던 산남의병부대는 1908년 7월 해산하였다. 이후 동지들과 함께 각지를 전전하며 유격전을 감행하다가 1909년 2월 영천에서 붙잡혔다. 1909년 11월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이른바 절도죄와 폭행죄로 징역 10년을 받았다.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겪던 중, 1910년 8월말 특사로 사면되어 출옥하였다. 1915년 7월 풍기의 광복단(光復團)과 대구의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이 통합하여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를 조직할 때 참여하였다. 그 뒤 1919년 3월 서울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붙잡혔고, 그해 8월 30일에 징역 6월, 집행유예 2년을 받고 석방되었다. 1923년 봄 만주 밀산(密山)으로 갔다. 4월 8일 밀산 한성동(韓成洞)에 도착하여 산남의진에서 함께 활동했던 규당(葵堂) 손진구(孫晉球)와 칠곡 출신의 장성우와 재회하였다. 1921년 가을에 밀산 한성동을 개척하고 1922년 한성학원(漢城學院)을 설립하여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 있던 손진구와 장성우를 도와 개간과 교육 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1927년 2월 국내의 독립운동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 귀국하였다가, 그해 1월에 결성된 신간회(新幹會)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각처에 신간회 지회가 결성되는 과정에서 같은 해 10월 미산에서 신간회지회를 결성하였다. 1928년 6월 다시 서울로 돌아와 신간회가 추진하고 있던 전국순회강연회에 참여하였으며, 11월 다시 밀산으로 돌아오는 길에 간도의 용정(龍井) 등지에서 동포들에게 강연회를 열기도 하였다. 1930년 봄 신병으로 귀국하여 서울을 거쳐 8월 10일 향리 칠곡으로 돌아왔으나,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1930년 9월 17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권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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