林顯周
顯周1858. 11. 15 ~ 1934. 4. 30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최익현 의병부대(태인의진)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중기의병(최익현 의병부대)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58년 11월 15일 전라남도 구례군(救禮郡) 토지면(土旨面) 파통리(把通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평택(平澤), 자는 희서(希瑞), 호는 경당(警堂)이다.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의 문인으로 1906년부터 최익현 의병부대에서 활동하였다. 1905년 일제에 의해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외교권이 박탈당하는 등 국권 상실의 위기가 현실화되자,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임병찬(林炳贊)·최제학(崔濟學)·고석진(高石鎭)·최학령(崔學嶺)·이용길(李容吉)·손종궁(孫鐘弓)·김태원(金泰元)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논의하였다. 그리고 군수 물자를 준비하는 한편, 당시 충남 정산(定山)으로 내려와 있던 최익현을 모셔와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의병부대를 결성하였다. 이 과정에서 임병찬의 아들 임응철(林應喆)과 손자 임진(林鎭), 김태원 등과 함께 미리 백여치(白如峙)로 내려가 최익현을 직접 모시고 오기도 하였다. 1906년 6월 태인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창의 격문을 발한 뒤 공식적으로 의병부대를 조직하고, 정읍군(井邑郡)·순창군(淳昌郡)·옥과군(玉果郡)·곡성군(谷城郡)·담양군(潭陽郡) 일대를 순회하면서 의병의 세력을 확산시키는데 주력하였다. 이후 주변 유생들이 합류하는 등 600여 명의 군세를 확보한 의병부대는 몇 차례 소규모 전투에서 일본군을 압도하며 무기와 문서를 노획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전투보다는 전주(全州)를 거쳐 서울로 북상한 뒤 외교적 담판을 통해 일본을 몰아낼 것을 최종 목표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두드러진 전투는 없었다. 때마침 진압하러 온 적군이 관군인 것을 알게 된 의병장 최익현은 “동족끼리는 싸울 수 없다”며 의병부대 해산을 결정하였다. 이에 다수의 군세가 흩어진 가운데 임병찬·고석진·김기술(金箕述)·문달환(文達煥)·양재해(梁在海)·나기덕(羅基德)·이용길·최제학·조영선(趙泳善)·조우식(趙愚植)·류해용(柳海瑢) 등과 함께 최익현을 곁에서 끝까지 지키다가 결국 붙잡혔다. 이들과 함께 전주진위대로 호송되었다가 곧 서울로 압송되어 재판에 넘겨졌다. 재판 결과 최익현은 유형 3년, 임병찬은 유형 2년을 받았고, 양재해·이용길·김기술·문달환·조두식·조영선·유해용·나기덕 등과 더불어 태(笞) 100도(度)를 받아 고초를 겪었다. 풀려난 후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이후 재산을 처분해 1915년 3월 구례군 문척면(文尺面) 오봉산(五峰山) 아래에 봉산사(鳳山祠)를 세우고, 최익현과 주자(朱子)를 배향하였다. 또한 오봉정사(五鳳精舍)를 건립하고, 후학들이 민족정신과 항일정신을 배양할 수 있도록 교육하며 여생을 보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노상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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