林永化
永化1884 ~ 1910. 6. 3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나성화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국장(2000)
관련 사건
- · 후기의병(나성화 의병부대)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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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2000) 전라남도 나주군(羅州郡) 시랑면(侍郞面) 내동(內洞) 출신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1910년 당시 27세이므로 1884년생으로 추정된다.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09년 나성화(羅成化) 의병부대에 들어가 장포(長砲)의 임무를 맡고, 일본인 처단과 군자금 모집 활동 등을 전개하였다. 동향 출신인 의병장 나성화는 1907년 박영근(朴永根)·유종환(兪鍾煥) 등과 함께 고향에서 의병을 모집해 의병부대를 조직하였다. 나성화는 먼저 전수용(全垂鏞)·김동신(金東臣) 의병부대에서 활동하다가, 1908년 2월 경에는 전남 함평(咸平)·장흥(長興) 등지에서 많은 승리를 거두고 있던 심남일(沈南一) 의병부대에 들어가 후군장(後軍將)으로 40여 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09년 4월 29일 나성화 의병부대에 가담하였다. 그해 5월 30일 친동생인 임도돌(林道乭)이 추가로 참여하자, 의병장 나성화와 순독·보초감독인 박인찬(朴仁贊) 등과 함께 나주군·무안부(務安府)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7월 2일 오후 8시 나성화와 사초십장(四哨什長) 정낙중(鄭洛中)을 포함한 20여 명의 동료들과 함께 무안부 삼향면(三鄕面)에 사는 일본인 율산학길(栗山鶴吉)과 백전희일(白田喜一)을 처단하고, 군자금 24원과 물품 등을 모집하였다. 심남일 의병장이 같은 해 7월 21일 의병 해산 조칙을 받고 의병부대를 해산하였으며, 이어서 그해 9월부터 전개된 일제의 ‘남한대토벌작전’으로 더 이상의 의병활동을 지속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러자 박인찬·임도돌 등과 함께 목포 헌병분견소로 가서 자수하였지만, 결국 조사를 받고 재판에 넘겨졌다. 1909년 11월 20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이른바 폭동죄 등으로 교수형(絞首刑)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1910년 4월 12일 대구공소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지만, 같은 해 5월 16일 고등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었다.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겪다가, 그해 6월 3일 형 집행으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노상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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