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울봉
高蔚奉1894. 4. 6 ~ 1923. 5. 22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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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94년 4월 6일 충청남도 서산군(瑞山郡) 대호지면(大湖芝面, 현 당진시 대호지면) 적서리(赤䑕里)에서 태어났다. 향리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3·1운동 당시 대호지면에서는 남주원(南柱元)·이두하(李斗夏)·남계창(南啓昌)·남상직(南相直)·남상락(南相洛)·남상희(南星熙) 등 도호의숙(桃湖義塾) 출신 유생들의 주도로 독립 만세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고종(高宗)의 인산(因山)에 참예하기 위해 상경하였다가 서울의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한 뒤, 향리에서도 만세 운동을 실행할 것을 결의하였다. 남주원·이두하 등은 서울에서 배포된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여 지역의 주요 인사들에게 서울의 시위 상황을 전달하면서 대호지면의 독립 만세 운동을 제안하였다. 면장 이인정(李寅正)과 송재만(宋在萬)·민재봉(閔載鳳)·강태원(姜泰沅)·김동운(金東云) 등 면사무소 직원들, 천도교(天道敎)계에서는 백남덕(白南德)·홍순국(洪淳國) 등, 지역 유지로는 이춘응(李春應)·남상집(南相集)·김홍균(金烘均)·남정혁(南廷爀)·홍월성(洪月星)·한운석(韓雲錫) 등이 뜻을 같이하여 동참하였다. 면사무소 직원인 송재만이 행동총책으로서 구체적인 만세 시위를 준비하였다. 그는 면사무소 인력과 행정력을 이용하여 주민들에게 배포할 독립선언문과 한운석이 지은 애국가를 인쇄하였다. 또한 관내 도로 보수 공사를 위한 노동력 동원을 명분으로 다수 주민들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면장 명의로 ‘도로수선병목정리(道路修繕並木整理)의 건’이라는 공문서를 작성하여 각 마을에 통보하였다. 마을 구장의 통보를 받고 4월 4일 아침 도로 보수 공사에 사용할 연장을 챙겨서 대호지면사무소로 갔다. 면사무소 앞에 작업에 참여할 600여 명의 주민이 모이자 면장 이인정이 오늘 모인 것은 작업을 위한 것이 아니라 만세 시위를 하기 위한 것이라는 취지의 연설을 하였다. 이인정 등의 연설을 듣고 공감하여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송재만 등의 지휘에 따라 선두에 대형 태극기를 앞세운 시위 대열에 참여하여 ‘대한 독립 만세’를 연창하며 약 7킬로미터 떨어진 정미면 천의장터로 향하였다. 시위 대열이 천의장터로 행진하는 과정에서 많은 주민이 속속 동참하여 시위대 규모는 1,000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천의장터에 도착하자 군중과 함께 장터 한복판에 대형 태극기를 세우고 독립 연설회를 개최한 뒤 천의주재소 순사들을 무력화시키고, 선도에 서서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행진하였다. 천의장터에서의 만세 시위가 마무리될 무렵 당진경찰서(唐津警察署)에서 급파된 순사들의 발포로 4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에 격분하여 천의주재소 습격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송재만 등의 지휘에 따라 이춘응·김길성(金吉成)·김부복(金夫卜)·김장안(金長安)·송봉운(宋逢云)·김팔윤(金八允) 등과 함께 대열의 선두에서 일본 경찰을 구타하고 이들이 소지한 무기를 탈취하였다. 부상당한 일본 경찰들이 주재소로 도주하자, 쫒아가서 주재소를 향해 수십 차례 돌을 던져 건물과 집기, 기물을 부수는 등 주재소를 파괴하였다. 이후 4월 8일 2차로 봉기할 것을 기약하고 해산하였다. 이날의 시위 이후 대호지면으로 출동한 홍성헌병수비대(洪城憲兵守備隊)에 5월 3일 체포되어 10월 24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및 상해, 소요죄, 공문서 위조행사 등의 혐의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2월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도 동일한 징역 1년 형의 판결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일본 경찰의 고문과 수형 생활의 후유증으로 출옥한 지 3년 만인 1923년 5월 22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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