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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相永

相永

1886. 2. 21 ~ 1909. 1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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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林相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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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화순(和順)의병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전라남도 화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양회일 의병부대(쌍산의진)

포상 정보

  • · 애국장(2005)

관련 사건

  • · 후기의병(양회일 의병부대)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2005) 1886년 2월 21일 전라남도 화순군(和順郡) 이양면(梨陽面) 증리(甑里) 에서 태어났다. 전라남도 능주군(綾州郡) 도림면(道林面) 증동(甑洞, 현 화순군 이양면 증리)에 거주하였다. 이명은 천권(千權)·석천(石泉)이다. 1907년 양회일(梁會一)이 이끄는 쌍산의진(雙山義陳)에서 참모로 활동하였다. 양회일은 전남 능주(綾州) 출신으로 본관은 제주이며,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의 후손으로 시문에 뛰어나고 충성심이 두드러져서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은 인물이었다. 양회일은 일본이 을사늑약을 강요하여 외교권을 박탈하자 증리를 중심으로 한 쌍산(雙山, 계당산(桂堂山))에서 임창모(林昌模)·양열묵(梁烈默)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양회일은 1907년 1월 19일 “을사늑약으로 사직과 강토가 다 무너졌고, 송병선(宋秉璿)·최익현(崔益鉉)·조병세(趙秉世)·민영환(閔泳煥) 등의 원로들이 순국했으니 우리 모두 일어나서 왜를 물리치고 역신들을 응징하기 위해 3월 상순에 쌍산의진에 참여하라”는 내용의 격고문(檄告文)을 발표하면서 의병봉기의 당위성을 분명히 하였다. 이후 준비 과정을 거쳐 1907년 (음)3월 양회일을 대장으로 추대하면서 쌍산의진이 조직되었다. 일찍부터 증동에 위치한 중조산[中條山, 현 계당산(桂堂山)]에 은거하였고,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의병에 참여하기로 생각하였다. 1907년 초 양회일 등이 자신의 마을에서 쌍산의소(雙山義所)를 세우고 창의를 준비하자, 군량미를 마련하고 의병 수십 명을 모집해 당숙인 임노성(林魯成)과 같은 마을의 임노복(林魯福) 등과 함께 합류하였다. 이후 쌍산의진은 부장 신재의(辛在義), 선봉장 이광선(李光善), 중군장 임창모, 후군장 노응현(盧應玄), 도포장 유화국(柳化國), 우포장(右砲將) 임노성, 호군장(犒軍將) 임노복, 총무 양열묵, 서기 이병화(李秉華), 군의 전신묵(全信黙) 등을 임명하며 부대의 체계를 갖추었고, 모집된 병력은 약 200명에 달하였다. 이때 참모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이들과 함께 1907년 4월 능주와 화순에 위치한 관공서와 주재소, 일본인 상가 등을 차례로 공격해 무기와 총탄 등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여세를 몰아 동복면(同福面)으로 나아가 그길로 광주(光州)로 진격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같은 해 4월 광주로 가기 위한 길목으로 능주군 읍내면(현 화순군 화순읍) 이십곡리(二十谷里)에 위치한 판치(板峙)[현 너릿재, 도마치(刀麻峙)]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고 크게 패하였다. 그러면서 양회일을 비롯한 수뇌부들의 상당수가 일본군에 붙잡혀 쌍산의진은 결국 해체되었다. 이때 몸을 피하여 화순군 이양면(梨陽面)과 보성군(寶城郡) 복내면(福內面)의 경계에 있는 계당산에 은거하였다. 1909년 11월 6일 보성의 일제 헌병에게 붙잡힌 후 구타당해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노상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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