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致萬
致萬1850 ~ 1909. 11. 20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이석룡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족장(2010)
관련 사건
- · 후기의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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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10) 전라북도 임실(任實) 구고면(九皐面) 용구암(龍九岩) 출신이다. 자료에 따르면 1850년생으로 추정된다. 전북 산간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임실 지역의 농촌 유생 출신 이석용(李錫庸)과 함께 의병활동을 하였다.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과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으로부터 사상적 영향을 크게 받았던 이석용은 고종의 강제 퇴위, 일제 침략 저지를 위해 1907년 8월 29일부터 의병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음)9월 12일 이석용은 호남창의소(湖南倡義所)를 표방하며 전해산(全海山) 등과 같이 기병하였다. 당시 기병 규모에 대해 이석용은 『정재이석용창의일록(靜齋李錫庸倡義日錄)』에 직접 천여 명으로 서술하였으나, 전주공판기록(全州公判記錄)의 문답에서는 3백 명이라고 답하여 서로 차이가 난다. 이석용 의병부대는 의진약속(義陳約束) 14개 조항과 의령(義令) 10조를 제시하여 의병 규율을 엄격히 하였다. 일본군을 적대시하되 청과 서양인에게는 무고한 원수를 사지 말 것과 문벌과 귀천을 가리지 말고 오로지 인물 본위로 모병하는 것에 힘쓸 것, 궁장(弓匠), 공장(工匠), 의원(醫員) 등 기술을 갖춘 이들을 함께 뽑아 부대의 능력을 향상시킬 것, 군량 군자금 모집과정에서 무리하여 인심을 잃지 않을 것, 이욕(利慾)을 자제할 것 등이 의진약속의 주요 내용이었다. 의령 10조에서는 국가에 충성하고(勤王事), 명분을 바르게 하며(正名分), 선비를 존경하는(敬士類) 가운데 민심을 평안히 할(安民心) 것을 주문하는 등의 내용이 담겼다. 농민들과 천민들로 주로 구성된 이석용 의병부대는 임실(任實)·진안(鎭安)·장수(長水)·운봉(雲峯)·용담(龍潭)·남원(南原) 등지의 산간지대에 주둔하며, 일본군과 친일 조선인, 특히 일진회 회원들을 대상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육순에 가까운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1907년 12월 21일부터 이석용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동료 의병 50여 명과 무장한 채로 구고면 두봉리(斗峰里) 일대에 머물다 순사대의 공격을 받고 이를 피하기도 하였다. 1909년 3월 이석용 의병부대가 해산을 맞이한 이후에도 함께 의병활동을 지속하였고, 같은 해 9월 20일경 붙잡혔다. 1909년 10월 8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이른바 폭동을 이유로 징역 1년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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