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元奉
崔元奉1895. 12. 6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서로군정서
포상 정보
- · 애국장(201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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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2010) 1895년 12월 6일 평안북도 강계군(江界郡) 이서면(吏西面) 함부동(咸富洞)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최상봉(崔尙奉)이다. 8세 무렵 가족과 함께 만주(滿洲)로 이주하였다.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노동에 종사하며 생활하였다. 1922년 7월 남만주 지안현(輯安縣) 태평구(太平溝)에서 김수봉(金守奉)·현기순(玄基旬)·김기풍(金基豊) 등과 만나 협의한 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참여하였다. 오른팔에는 ‘군정서’, 왼팔에는 ‘결사대’라고 문신하고 활동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난 이후 부민단(扶民團)·교육회·자신계(自新契)가 통합하여 남만주 유허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에서 한족회(韓族會)가 결성되었다. 4월 한족회에서는 독립전쟁을 수행할 기관으로 군정부(軍政府)를 조직하였다.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성립됨에 따라 1919년 11월 군정부는 서로군정서로 개편되었다. 서로군정서 주요 구성원은 최고 책임자인 독판(督辦) 이상룡, 부독판 여준(呂準), 참모부장 김동삼(金東三), 사령관 지청천(池靑天) 등이었다. 서로군정서에서는 남만주와 한반도 북부지역에서 일제 기관을 공격하고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며 친일행위자를 처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문학빈(文學彬)·최석종(崔錫宗) 등과 함께 강계군 고산면(高山面) 고산진(高山鎭)에서 일제 기관을 공격하고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기로 계획하였다. 1922년 10월 3일 밤 동지 30여 명과 함께 고산진으로 이동하여 일제 경찰관 주재소를 공격하고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한 후 압록강을 건너 복귀하였다. 1927년경 강계군 강계면 서부동(西部洞)에서 운송업체 선부(船夫)로 근무하였다. 1928년 10월 20일 강계경찰서에 붙잡혔다. 신의주지방법원 강계지청 검사국에 송치되어 조사를 받은 후 재판을 받게 되었다. 1929년 2월 13일 신의주지방법원 강계지청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 살인죄, 방화죄, 가택 침입죄, 강도 치사죄, 강도 치사 미수죄, 절도죄로 징역 15년을 받았다. 1929년 2월 24일 신의주형무소에서 경성형무소로 이감되어 옥고를 겪었다. 1941년 6월 29일 가출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최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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