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봉주
鄭鳳冑1894 ~ 1923. 1. 31
관련 단체
- · 서로군정서
- · 대한통의부
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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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1) 자료의 한계로 출신지를 정확히 알 수 없다. 자료에 따르면 1894년생으로 추정된다. 만주 지역에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및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소속 독립군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창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다른 독립운동 단체 및 독립군 조직과의 합병을 꾀하였다. 서간도 군정부(軍政府)와 한족회(韓族會)는 이에 호응하여 1911년 11월 17일 서로군정서로 개칭되었다. 서로군정서의 조직으로 무장투쟁을 담당하는 부서인 사령부(司令部), 참모부(參謀部), 참모처(參謀處)를 두었고, 이를 보조하는 부서로 정무청(政務廳), 내무사(內務司), 법무사(法務司), 재무사(財務司), 학무사(學務司), 군무사(軍務司)를 설치하였으며, 입법 및 안건 결정기관으로 서의회(署議會), 지방 조직으로 분서(分署)를 두었다. 더불어 서로군정서의 부대로는 의용군(義勇軍) 제1중대, 의용대(義勇隊), 별동대(別動隊), 신흥학우단(新興學友團) 등이 운용되었는데, 이 시기에 서로군정서 의용대의 일원이 되어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 9월부터 시작된 일본군의 불령선인초토계획(不逞鮮人焦土計劃)으로 인한 경신참변(庚申慘變)으로 북간도 지역에서의 독립군의 거점이 크게 위축되었다. 이후 1922년 봄 만주 지린성(吉林省) 환런현(桓仁縣)에서 열린 남만한족통일회(南滿韓族統一會)에서는, 남만주의 독립군단들 중 서로군정서·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광한단(光韓團)·한교민단(韓僑民團)·평북독판부(平北督辦部)·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 등 대표자들이 모여 각 조직을 통합한 형태의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를 조직하였다. 나아가 1922년 8월 23일, 8단 9회의 대표자 71명은 환런현 마권자(馬圈子)에서 다시 한 번 각 조직을 완전히 통합할 것을 확약하고, 남만한족통일기관의 이름을 대한통의부를 결성하였다. 대한통의부 의용군 휘하에는 제1중대부터 제5중대의 독립군 조직과, 기타 독립소대, 유격대, 헌병대가 편제되었다. 제1중대는 지린성, 지안현(集安縣), 퉁화현(通化縣) 일대, 제2중대는 펑톈성(奉天省) 환런현 이구(裡溝) 일대, 제3중대는 펑톈성 환런현 북전자(北甸子) 일대, 제4중대는 지린성 지안현 노야령(老爺嶺) 일대, 제5중대는 펑톈성 싱징현 왕청문(旺淸門) 일대를 관할하였다. 더불어 이 3개 중대는 각각 그 계통과 연원이 달랐고 별도의 명령 계통을 가지고 있었는데, 제2·4중대는 일찍이 만주 펑톈성 류허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서구(西溝) 대화사(大花斜)에서 유림 및 의병계열 독립운동가 560여 명이 모여 조직된 대한독립단 출신이 중심이었다. 이때에 이르러 대한통의부 의용군 제2중대로 편제되어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3년 1월 31일 오후 7시경, 의용군 제2중대장 홍석호(洪碩浩)을 비롯하여 부대원들과 함께 평북 위원군(渭原郡) 밀산면(密山面) 남파동(南坡洞) 부근에서 일제 경찰 20명과 약 1시간 교전하였다. 이 때 일제 경찰 5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린 후, 자정 무렵 위원군 구읍면(九邑面)에서 다시 1시간 가량 교전하여 일제 경찰 2명을 척살하였으나, 박도방(朴道芳)·김택병(金澤柄)이 중상을 입었다. 이 과정에서 마침내 적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일제는 유품 중 모젤 권총(木匣銃) 한 자루를 강탈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김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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