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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현

鄭壽賢

1887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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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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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조선민족대동단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16)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2016) 서울 익선동(益善洞) 출신이다. 1921년 공판 당시 35세로 확인되므로 1887년생으로 추정된다. 1920년 신덕영(申德永)을 따라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는데 조력하였다. 광주지방법원 판결문에 따르면 신덕영의 외처(外妻)였다. 대동단의 정식 명칭은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으로 1919년 3월말 전협(全協)과 최익환(崔益煥)이 ‘전조선 민족의 대동단결’을 표방하며 조직한 단체였다. 이후 적극적 조직 확장과 인물들을 영입하던 중, 김가진(金嘉鎭)이 뜻을 함께하고 가입하게 되면서 총재로 추대되었다. 김가진은 1919년 (음)7월 신덕영을 만나 대동단에 가입시키고 본인이 직접 지도하던 대동단 조선지부를 관장하게 하였다. 신덕영은 충북 음성(陰城) 출신으로 독립운동의 뜻을 품고 191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류허현(柳河縣)의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에서 수학한 바 있었다. 1919년 만세운동 이후에는 이동녕(李東寧)과 박은식(朴殷植) 아래에서 활동하다가 군자금 모금의 임무를 지니고 귀국한 뒤 서울에서 거주하며 민족의식 확산을 위한 활동을 펼치다 김가진을 만나 대동단에 가입하였다. 이 무렵 신덕영의 외처로 익선동에 거주 중이었는데 신덕영의 권유로 대동단에 가입하였다. 신덕영은 대동단 활동을 위해 1920년 7월 만주농림주식회사(滿洲農林株式會社)를 만들고 동지들을 주식모집원으로 가장하여 군자금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특히 1920년 8월경부터는 대동단 전남지부에서의 활동에 주력, 주로 전남 지역 대부호들에게 군자금을 받아내는 활동을 하였다. 신덕영은 대동단 총지부장의 명의로 「우리 동포 재산가 제씨에게 경고한다」는 제호로 독립자금을 요구하여 전남 광주군 본촌면(本村面) 일곡리(日谷里)의 노종룡(盧鍾龍), 양지리(揚地里)의 정해붕(鄭海鵬), 오치면(梧峙面) 방축리(防築里)의 이계익(李啓翼), 화순군(和順郡) 능주면(綾州面) 양재국(梁在國), 향청리(鄕廳里)의 박현경(朴賢景), 담양군(潭陽郡) 담양면 담주리(潭舟里)의 국채웅(鞠埰雄)으로부터 수백 원에 달하는 군자금을 확보하였다. 이러한 신덕영과 대동단의 독립운동 자금 확보 활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1920년 (음)8월경 서울에서 모형 권총 2정을 입수, 경찰의 눈을 피해 짐으로 위장하여 직접 광주로 내려가 전달한 뒤 활동을 독려하였다. 이들의 활동은 1919년 만세운동 이후 전남에서 처음으로 일어난 중대한 독립운동 사건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일제는 전남 각 지역에 비상선을 동원하여 독립운동 관련 단체에 대한 대대적 단속과 수색에 총력을 기울였고 1920년 12월 5일 신덕영과 대동단 단원들은 담양 경찰서 창평주재소(昌平駐在所) 순사에게 붙잡혔다. 이와 함께 관련자들에 대한 조사도 진행되어 함께 붙잡혔다. 1921년 4월 26일 공판 당시 임신 6개월의 상태였다. 1921년 5월 31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 ‘공갈, 가택침입, 방화미수’ 및 ‘총포화약류 취체령 시행규칙’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정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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