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병준
張柄俊1893. 6. 10 ~ 1972. 3. 15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민국 임시정부
- ·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 · 신간회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무안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893년 6월 10일 전라남도 무안군(務安郡) 장산면(長山面) 대리(大里)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장진섭(張鎭燮)이며, 4형제 가운데 첫째다. 본관은 인동(仁同)이고, 호는 포양(包洋)이다. 이명은 장현숙(張玹淑)이다. 어릴 때는 한학을 공부하였으나 형제들과 함께 목포에서 근대학문을 공부하고, 서울로 올라가 보성전문학교를 거쳐 니혼대학(日本大學) 법학과를 다녔다. 일본 유학 중에는 보성전문학교 출신으로 주오대학(中央大學) 법과에 재학 중이던 이춘숙(李春塾)과 절친한 사이였다. 1919년 3월 18일 고향인 대리의 사정(射亭 : 활터에 세운 정자)에 장산도(長山島) 주민 수십 명을 모아 놓고 서울의 만세시위 소식을 전하면서 만세운동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시위 대열을 이끌고 주변 마을을 행진하면서 독립 만세를 불렀다. 2시까지 만세 시위를 벌인 뒤 김극태·고제빈 등 주도자들과 함께 바로 섬을 떠났다. 3월 20일 대전역에 도착하여 다른 주도자들과 헤어져서 서울로 갔다. 서울에 도착한 이후 한성정부(漢城政府)를 수립하는 대한국민대회(大韓國民大會) 조직에 참여하여 간부로 활동하였다. 이때 보성전문학교 선배인 이춘숙과 함께 활동하였으며 이후 임시정부에서도 이춘숙을 비롯하여 함경도 출신의 유학생 그룹과 행동을 함께하였다. 다만 국민대회가 개최되기 이전에 서울을 떠났던 것으로 추측된다. 서울을 떠난 뒤에는 상하이(上海)로 가 1919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4회 회의에서 한남수(韓南洙)·김철(金徹)과 함께 전라도 대표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바로 해임되었다. 이후 상하이·만주·연해주·국내를 오가는 연락 임무를 담당하다가 1919년 가을 다롄(大連)에서 민정서(民政署)에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1919년 8월 서울에서 이동욱(李東旭)·박기영(朴琪永)과 함께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를 조직하고, 임시정부와 연락 임무를 담당하였다. 이들과 함께 1920년 3월 1일을 대한독립 1주년 기념일로 정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한 행사를 위해 2월부터 본격적으로 문건을 만들고 조직망을 연결하였다. 2월 26일 대한국민회 명의로 전국의 학생 청년과 상업가 일동에게 3월 1일을 맞이하여 휴교와 철시, 축하대회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는 「대한독립일주년축하경고문(大韓獨立一週年祝賀警告文)」 등의 문건을 작성하였다. 2월 27일 혈성단(血誠團) 명의로 3월 1~2일 휴교를 촉구하는 문건, 2월 28일 대한민국 국민대회 결사단 명의로 「혈루를 흘리자」라는 문건을 작성하고, 3월 1일 「대한독립일주년축하경고문」을 배포하였다. 경성부인성서학원(京城婦人聖書學院) 교사였던 이동욱이 문건의 인쇄를 맡았는데, 이때 자금을 지원하였다. 문건은 서울은 물론이고 대전·대구·마산·목포 등 전국에 배포되었다. 2월 26일 서울에 올라와 있던 표성천(表聲天)에게 태극기 2장과 문건 200장을 넘겨주었고, 서태석(徐邰晳)에게도 전달하여 유인물을 뿌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1주년 기념행사를 위한 준비 활동이 사전에 발각되어 기념행사는 실패로 돌아갔으며, 그해 3월 20일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2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겪다가 1922년 6월에 풀려났다. 이후 장산도에 학교 설립을 추진하였고, 하의도(荷衣島)의 농민 운동에도 지지를 표시하였다. 동시에 서태석(徐邰晳) 등과 함께 신안군의 장산도·암태도(巖泰島)·자은도(慈恩島)와 목포 등에서 섬과 육지를 연결하는 운동 네트워크를 형성하였다. 1927년 신간회(新幹會) 목포지회에 참가하여 조사부 총간사로 활동하였다. 8월 31일 ‘목포경찰서 폭행대책강구 무목사회단체연합회’에 신간회 조사부 간사로 연합회 실행위원으로 선정되었다. 그해 11월 일본 노동농민당(勞動農民黨)과 신간회 도쿄(東京)지회 관계자들의 하의도 농민들의 토지 회수 투쟁 비원 방문을 후원하였다. 1927년 12월 신간회 목포지회 제1회 정기대회에서 내분이 발생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한 5인의 전형위원 가운데 한 명으로 선정되어 내분 수습과 활동 정상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1928년 신간회 목포지회 총무간사로 활동하였으며, 1929년 신간회 복대표대회(複代表大會)에 목포구 대표로 참가하여 중앙집행위원과 중앙검사위원을 선출하기 위한 13인의 전형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되어 집행부 조직에 참여하였다. 1930년 제3회 신간회 목포지회 정기대회에도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1930년 2월 목포·나주·곡성·순천·장성의 신간회 중심 인물들과 함께 일제 경찰에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김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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