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선
全泰善1868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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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독립장(1963)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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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63) 1910년 43세인 것으로 미루어 1868년생으로 추정되며, 당시 평안남도 평양(平壤) 남수구내(南水口內) 융흥부(隆興部) 칠리(七里)에 거주하고 있었다. 강성녀(姜性女)와의 사이에 5남매를 두었다. 1907년 기독교에 입문하였으며, 1909년 평양에서 목재상을 경영하였다. 1909년 이재명(李在明)이 매국적 처단 계획을 세우고 9월 하순경 동지 규합을 위해 평양으로 왔을 때 지인서(池麟瑞)·송인섭(宋仁涉)·이재순(李載純)·김용호(金龍鎬)·지석현(池錫現) 등과 거사에 참여하였다. 이에 평양 동산현(東山峴)의 서묘(西廟) 경흥야학교 내의 서적종람소에서 이재명·박태은(朴泰殷)·김정익(金貞益) 등과 함께 이용구 처단을 밀의하였다. 12월 6일 평양 박태은의 집에서 이재명·이동수(李東秀)·박태은·김정익·이응삼(李應三) 등과 거사를 논의하였다. 12월 7일 이재명·이동수·김병록은 이완용 처단을 담당하고, 김정익·조창호(趙昌鎬)는 이용구를 처단키로 하였으며, 자금은 오복원(吳復元)·박태은·이응삼 3인이 조달하고, 권총과 단도 등 무기 구입을 조창호와 함께 맡았다. 이후 단총 2정을 마련하여 12월 12일경 무기를 밤 자루 속에 숨겨 상경하여 간동(諫洞, 현 사간동)에 사는 대한매일신보사 사원 이교담(李交倓)의 집에 숨겼다. 이후 이재명에게 무기를 전해주고, 이교담의 집에 잠복하면서 김용문(金龍文) 및 김정익과 함께 이완용의 이동 통로 및 시각을 이재명에게 알려주는 일을 담당하였다. 아울러 시간적 여유가 없을 때에는 자신이 거사를 실행하기로 하였다. 12월 17일경 이재명의 숙소에서 마지막 회합을 갖고 이완용을 먼저 처단하고, 이어서 이용구를 처단키로 결정하였다. 1909년 12월 22일 이재명·김병록·이동수가 서울 종현(鍾峴) 천주교당(현 명동성당) 앞에서 이완용 처단 의거를 감행하였으나 중상을 입힌 채 이재명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이후 평양으로 도피하였다가 1910년 1월 초에 붙잡혀, 1910년 5월 18일 징역 10년을 받았다. 이에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7월 12일 경성공소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강영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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