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홍
張鎭弘1895. 6. 6 ~ 1930. 7. 31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광복회
포상 정보
- · 독립장(1962)
관련 사건
- · 대구 조선은행 폭탄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2) 1895년 6월 6일 경상북도 칠곡군(漆谷郡) 문림리(文林里, 현 경북 구미시 옥계동)에서 장성욱(張聖旭)과 순천(順天) 김씨의 3남 중 맏이로 태어났다. 본관은 인동(仁同)이고, 아명이 재환(在煥), 자는 준극(俊極), 호는 창여(滄旅)이었다. 향리의 사립 인명학교에 들어가 장지필(張志必)의 가르침을 받고 1907년 졸업하였다. 1914년 4월 조선보병대에 들어가 서울서 복무하다 1916년 상등병으로 자원 제대하였다. 그 후 동향 선배이고 인명학교 동창이기도 한 이내성(李乃成)의 권유로 광복회에 가입하였다. 1918년 4월경 중국 펑티엔(奉天)으로 가서 독립지사 김정묵(金正黙)과 이국필(李國弼)을 만나본 후 러시아 하바롭스크로 건너가 한인사회당 예하의 적위대 군사교관이 되었다. 러시아혁명 직후의 내전 상황에서 하바롭스크가 백위군에 점령되고 적위대가 해산되면서 교육도 3개월 만에 중단되자 귀향하였다. 1919년 일제 군경이 3.1운동 진압 과정에 저지른 학살·고문과 파괴·방화의 만행을 세계만방에 폭로키로 마음먹었다. 아우 진환(鎭煥)이 5마지기 논을 팔아 만들어 준 6백 원을 갖고 매약(賣藥) 행상인이 되었고, 전국을 돌면서 일제의 만행 실상을 청취·조사하여 보고문을 만들었다. 7월에 인천항으로 들어온 미국 군함의 승조원 김상철(金相哲) 하사에게 영문 번역 및 각국 배포를 부탁하며 보고문을 넘겨주었다. 1925년 7월 김창숙(金昌淑)이 군자금 모집을 위해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일시 귀국, 9월에 이정기(李定基)도 베이징에서 귀국하고 대구에서 이육사(李陸史) 형제들과 암살단을 결성, 1926년 2월 장지필이 만주에서 귀국 등 일련의 움직임이 있은 후 1926년 12월 장진홍이 상경하여 이내성과 재회하고 독립운동 방법론을 상의하였다. 1927년 3월, 이내성의 소개로 찾아온 일본인 폭탄전문가 호리키리 시게사부로(堀切茂三郞)를 경북 경산의 여인숙에서 만나, 관공서·은행 등에 대한 폭탄거사를 추진키로 합의하고 자진 결행의 의사도 밝혔다. 1927년 5월 2일경 호리키리를 경북 영천에서 다시 만나 폭탄 제조법과 조작법을 전수 받고, 다이너마이트 및 뇌관 5개씩과 4척(尺) 가량의 도화선 및 50원의 자금을 제공받았다. 같은 달, 영천에서 일본인 고바야시 호지(小林峯治)에게 15원을 지급하고 다이너마이트 및 뇌관 각 30개와 도화선 25척을 사들였다. 그것으로 다수의 폭탄을 제조하여 대구의 경북도청, 경북경찰부, 조선은행 지점, 식산은행 지점, 그리고 인동 출신의 친일부호 장길상(張吉相)의 집 등, 다섯 군데의 목표물에 투척키로 계획하였다. 같은 해 8월에 가마솥을 부수어 나온 파편으로 채운 시제품 폭탄 2개를 제조하였다. 10월 1일 칠곡군과 선산군의 경계 지점인 봉화산 골짜기로 들어가 위력 실험을 해보고, 협곡 양쪽 암벽이 크게 패이고 무너질 정도의 위력을 확인하였다. 10월 16일 인동 자택에서 냄비·솥·괭이를 부수어 얻은 쇳조각들과 다이너마이트를 빈 깡통에 넣고 재로 채운 후 도화선을 연결시켜, 점화 후 20~30분이 경과하면 터질 대형폭탄 4개와 위급 시의 자결용 소형폭탄 1개를 제조하였다. 그리고는 공격용 폭탄을 1개씩 넣을 나무상자를 구입해 벌꿀선물인 것처럼 꾸미고, 겉면에 붙일 수신자·발송인 등의 쪽지를 필체 좋은 지인 황진박(黃鎭璞)에게 부탁해 써 받았다. 발송인은 ‘대구부 남산정 39번지 길전상회(吉田商會)’라는 가명을 썼다. 10월 17일 오후에 폭탄상자 4개를 자전거에 싣고 대구로 가서 포장용 신문지와 풀·삼끈 등을 구입한 후 매부 집에서 1박하였다. 18일 오전 9시경 대구역 앞 전정(前町)의 덕흥여관(德興旅館)에 들어가 방을 잡은 후 오전 11시경에 폭탄마다 점화시켜 상자에 넣고 신문지로 포장했다. 그리고는 여관 종업원 박노선(朴魯宣)을 불러 “선물용 벌꿀상자이니 조선은행 지점, 스토(須藤) 지사, 이시모토(石本) 경찰부장, 식산은행 지점 순으로 1개씩 속히 배달해 달라”고 부탁해놓고 여관을 빠져나갔다. 박노선이 맨 먼저 상정(上町, 현 중구 포정동)의 조선은행 대구지점으로 가서 상자 1개를 내놓았다. 포병 중위 출신인 은행원 요시무라 게츠(吉村潔)가 화약 냄새를 맡고는 수상히 여기어 황급히 열어보니 점화된 폭탄이 들어있는지라 바로 도화선을 끊었다. 전화신고를 받은 대구경찰서 고등계 주임과 순사 10여 명이 출동하여, 박노선을 체포함과 아울러 다른 상자 3개를 은행 옆 길가로 옮겨놓았다. 11시 30분경과 그 2분쯤 뒤, 그리고 다시 30초쯤 후에 연이어 폭발이 일어났다. 은행 창문 14개와 현관 유리문이 부서지고 파편이 천장·벽 등 수십 곳에 날아가 박혔으며, 순사 4명과 행원 1명, 행인 1명이 부상을 입었다. 10월 22일 칠성정(七星町)의 일본인 철도원 집에서 호리키리가 폭탄을 터뜨려 자살한 것으로 보도된 후, 은신처인 황진박의 집에서 2차 거사계획을 세웠다. 12월 안동군 서후면에 사는 친척 장용희(張龍熙)의 동참 의사를 얻어내, 안동경찰서 등 주요기관 파괴 목적의 폭탄 3개를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장용희는 거사를 결행 못한 채 신병으로 1928년 7월 사망하였다. 1928년 1월 영천의 김기용(金基用, 이명 김사실[金士實])을 찾아가 ‘대구 조선은행 폭탄사건’의 ‘범인’임을 밝혀 말하고, 결사적 동지가 되어 활동하겠다는 맹약을 받음과 아울러 영천경찰서와 읍내 부호 이인석(李仁錫)의 집에 투탄키로 합의하였다. 이에 위산통(胃散筒) 속에 다이너마이트와 뇌관을 넣고 다리미 부순 조각과 찰흙으로 채운 다음 철사로 돌려 묶는 방법으로 수류탄 2개를 만들어 넘겨주었다. 김기용은 예행연습을 하고 기회를 엿보던 중 1929년 3월 경찰의 공작에 넘어가 체포되고 말았다. 1천 6백 명의 경찰관이 동원된 대대적 수사망을 피해 1928년 2월 일본으로 건너갔다. 도쿄(東京)의 귀족원과 경시청 건물에 투탄한 후 소련으로 탈출키로 작정하고 폭약을 구하고자 애썼다. 그 사이 ‘ㄱ당 사건’으로 수감되어 있던 장택원(張澤遠)을 경북경찰부 고등과의 경부보 최석현(崔錫鉉)이 취조해 받아낸 진술에 의해 폭탄사건의 ‘진범’으로 지목되었다. 행방 탐문과 추적에 나선 경찰이 이춘득(李春得)·남주희(南周熙) 등 남녀 밀정 6명의 교묘한 공작에 힘입어 오사카(大阪)에 사는 아우 의환(義煥)의 안경점이 최종 은신처임을 알아냈고, 1929년 2월 14일 형사대의 급습으로 붙잡히고 말았다. 피체 후 쓰루하시(鶴橋)경찰서 유치장에서 만세 고창, 국내압송 도중의 기차와 여객선에서 도주 및 투신자살 기도, 경북경찰부 건물 2층의 취조실 밖으로 뛰어내림과 유치장 탈출 시도, 경산경찰서 유치장에서의 자살 기도 등으로 끝까지 저항하였다. 기소 후 1930년 2월 1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사형을 받아 항소를 제기하였다. 그해 4월 24일의 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고, 7월 21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며 확정되었다. 7월 30일 밤 11시경, 모아놓았던 수면제로 옥중 자결을 기도하여 이튿날(음력 윤6월 6일) 아침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영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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