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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昌模

昌模

미상 ~ 1909.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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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林昌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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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보성(寶城)의병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전라남도 보성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양회일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독립장(1963)

관련 사건

  • · 중기의병(양회일 의병부대)
  • · 후기의병(안규홍 의병부대)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3) 전라남도 보성군(寶城郡) 용문면(龍門面) 출신이다. 자료의 한계로 출생일자는 알 수 없다. 본관은 조양(兆陽)이며, 자는 낙균(洛均), 호는 월담(月潭)이다. 1906년 양회일(梁會一) 의병부대, 1908년 안규홍(安圭洪)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는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일으키며 한일의정서를 강요하여 대한제국의 군사권을 통제하고, 이어 을사늑약을 통해 외교권을 박탈하며 침략을 본격화 하였다. 이를 계기로 의병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고, 호남에서도 태인의 최익현(崔益鉉), 담양·창평의 고광순(高光洵), 광양의 백낙구(白樂九) 등 여러 의병부대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1906년 10월(음) 화순(和順)의 쌍산의소(雙山義所)에서도 양회일이 의병을 일으키고, 1907년 1월 격문을 발표하고 의병을 모았다. 평소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이후에 전개된 일제에 의한 국권 피탈에 울분을 표했으며, 일제와 일전을 벌여 나라의 원수를 갚고 국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에 능주군(綾州郡)에서 양회일의 권유로 의병에 참여하기로 결심하였고, 의병부대가 조직될 때 중군장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무기와 군량을 갖춘 양회일 의병부대와 함께 본격적으로 활동하였다. 1908년 4월 22일 능주와 화순의 군아(郡衙)를 공격해 점령하고 일본헌병분견소·세무서·우편소 등의 기관과 일본인 상가 등을 공격하였다. 또한 전신주를 파괴하거나 전선은 잘라버렸다. 능주와 화순을 점령한 후 지리산으로 들어가 장기 항전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의병장 양회일 등은 본래의 계획대로 동복을 거쳐 광주를 공격하고 북상하기로 결정하였다. 동복을 거쳐 광주로 향하던 도중 복천(福川)의 도마치(刀摩峙, 현 화순군 남면 유마리 일대)에서 일본군의 포위 기습을 받게 되었다. 부대원들은 일본군과 치열하게 교전하였으나 많은 사상자를 내고 전투에 패하며 부대가 흩어졌고, 그 와중에 양회일·안찬재(安贊在)·이윤선(李允先)·유태경(柳泰京)·신태환(申泰煥) 등과 함께 붙잡혔다. 체포된 뒤 재판에 넘겨져 7월 4일 양회일과 함께 유배형 15년을 받고 지도(智島)로 유배당하였다. 그러나 순종이 즉위하면서 12월에 특별사면을 받고 이듬해 풀려났다. 유배에서 풀려난 뒤 1908년 5월 무렵에 안규홍 의병부대에 합류하였다. 이후 적게는 70명에서 많을 때는 200여 명의 부대원을 거느린 독립부대를 편성하여 안규홍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영암(靈岩)·장흥(長興)·보성 및 복내장(福內場)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순천의 병티(並峙)고개에서 안규홍과 연계하여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안규홍 휘하의 선봉장 이관회(李貫會)와 한후장(捍後將) 안택환(安宅煥)이 전사한 가운데 그 자리를 대신하여 부대를 지휘하며 큰 승리를 거두는 데 역할을 하였다. 당시 일본 측 기록에는 전라도 일대에서 활동한 심남일(沈南一)·강무경(姜武京)·안규홍과 더불어 거괴(巨魁)로 표현하여 지목되고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1909년 호남지역에 일제 군경의 대규모 병력이 투입되며 의병에 대한 토벌작전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자, 많은 다수의 의병들이 자수, 귀순, 체포되었다. 이 과정에서 안규홍이 형세상 어쩔 수 없이 의병부대를 해산하자 남은 부대원들을 수습하여 끝까지 싸웠다. 8월 3일에는 원산(元山) 청포(靑浦)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8월 13일 12명의 부대원과 함께 장흥군(長興郡) 회령면(會寧面)에서 보성분견대(寶城分遣隊)의 습격을 받고 전투를 벌였다. 8월 25일에는 안진(安進) 등과 함께 의병 100여 명으로 거느리고 순천군(順天郡) 송광면(松廣面) 방면으로 진출하기도 하였다. 계속해서 의병활동을 전개하던 중 10월 13일 보성군 복내면(福內面) 흑석리(黑石里)에서 광주경찰서 순사로 일제 군경의 헌병보조원 밀정 역할을 했던 강인수(姜寅秀)의 보고로 소재지가 노출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출동한 일본 육군 보병 제2연대의 기습을 받았다. 일본군의 기급적인 포위망 속에서도 마지막까지 분전하였으나 안찬재 등 동료 7명과 함께 사망하였다. 이 과정에서 부친을 따라 의병에 가담하여 중군장을 맡았던 아들 임학규(林學圭)도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원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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