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鎭龍
鎭1879 ~ 1918. 5. 1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평산의병부대
포상 정보
- · 독립장(1962)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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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62) 황해도 평산군(平山郡) 주암면(舟岩面) 출신이다. 자료에 따르면 1879년생으로 추정된다. 부친 이영배(李英培)와 모친 여흥민씨(驪興閔氏) 사이에 외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석대(錫大) 또는 운서(雲瑞)이며, 호는 기천(己千)이다. 이명은 이석대(李錫大·李碩大)이다. 명문 유림 가문의 자손으로 태어나 6살 때부터 의암(義庵) 유인석(柳麟錫)의 문하에 들어가 한학을 배웠다. 15세 때 훈련원 판관이자 같은 유인석 문하인 사산(史山) 우병렬(禹炳烈)의 딸과 혼인하였다. 유인석의 제자로 항일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다가, 1905년 을사늑약으로 국권이 침탈당하자 분개하여 고향인 평산에서 장인 우병렬 등과 함께 거의하였다. 거의 직후에는 세력과 군사 지식이 부족하여 구체적인 활동은 미약하였으나,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와 대한제국 군대의 강제 해산을 계기로 평산의진(平山義陣)이 조직될 때 합류하면서 본격적인 의병활동을 시작하였다. 평산의병부대는 박기섭(朴箕燮)·우병렬·변석현(邊錫鉉)·채홍두(蔡洪斗) 등 평산지역의 화서계와 의암계 유생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되었다. 당시 목천 군수였던 박기섭이 대장이었고, 장인 우병렬이 중군장을 맡았으며, 이때 유격대에 소속되었다. 평산의병부대는 유학자들뿐만 아니라 농민이나 포수 그리고 다수의 강화 진위대 해산군인들까지 참여하여 4~5,000명 단위의 큰 부대를 이루었다. 이 부대는 도평산을 근거지로 하여 장수산·멸악산 등의 산속을 배경으로 황해도 각지에 분산 출진하여 일본군과 일제 식민기관 등을 공격하였다. 1907년 10월 유달수(柳達秀)·한정만(韓貞滿) 등과 함께 유격대를 이끌고 평산군 온정리·고지면·대룡리·세곡면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평산의병부대의 활동이 두드러지자 일제가 특별탄압부대를 파견하였고, 1907년 11월 4일부터 13일까지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1907년 12월 평산군과 배천군(白川郡)의 접경지역에서 전투 도중 유격대장 유달수가 전사하자, 유격대를 이어받아 평산군 세곡면과 산의면 그리고 남산리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1908년 4월 19일 일본군의 공세에 대응하기 위해 부대를 재편할 때 정식으로 유격대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대장이 된 이후에는 일본군의 거센 공세에 맞서 40~50명의 적은 병력으로 산지를 중심으로 유격전을 펼치며 항전을 이어갔다. 이에 일제는 거액의 현상금을 걸고 공세를 강화하여 탄압하였다. 국내에서의 항쟁 여건이 점점 악화되어가는 상황에서 스승인 유인석이 해외에 독립운동 근거지를 마련하고자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하자, 이에 협력하고 신식무기도 보급할 겸 1908년 8월 우병렬·박기섭 등과 함께 연해주로 이동하였다. 연해주에서 해외독립운동기지 건설을 돕고 무기와 군자금을 보급받은 뒤, 1908년 겨울 다시 국내로 돌아와 의병항쟁을 재개하였다. 1909년부터 1910년에 걸쳐 30~100여 명의 대원들을 이끌고 동쪽으로는 철원·평강, 서쪽으로는 평산·배천·해주·서흥·수안·재령 등 강원도와 황해도 일대를 넘나들며 지속적으로 유격전을 펼쳤다. 1910년 3월 3일에는 경의선의 계정역과 금성역 사이의 철로를 장악하고 그곳에 돌을 쌓아 북행열차를 전복시킨 뒤 출동한 일본군 평산·개성 연합수색대와 교전하여 격퇴함으로써 열차운행을 8시간이나 저지시키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한편 1910년 6월 21일 스승 유인석의 주도로 연해주 각지에 분산되어있던 의병세력을 통합하여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이 조직되자, 여기에 참여하고 의원(議員)직을 맡았다. 그러나 십삼도의군은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하기 전에 경술국치를 당하여 국망이 현실이 되었고, 일제의 요청을 받은 러시아가 활동을 제지하는 바람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해체되었다.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황해도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항전을 이어갔다. 그러나 일제가 1910년 11월 하순부터 1911년 4월 중순까지 ‘황해도 토벌’을 자행하여 그의 부대를 포함한 190여 명의 의병이 희생되었다. 그리고 1911년 9월 하순부터 11월 초순에 이르는 2차 탄압으로 다시 250여 명의 의병이 희생되는 등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국내에서 더 이상 조직적인 항일 무장활동이 어렵게 되자, 1911년 10월 의병부대의 지휘권을 중대장 한정만에게 이양하고 남만주로 망명하여 후일을 도모하였다. 조맹선(趙孟善)·박장호(朴長浩)·윤세복(尹世復)·차도선(車道善) 등과 함께 창바이현(長白縣) 푸쑹(撫松)에서 독립군부대를 편성한 뒤, 랴오닝성(遼寧省) 콴뎬현(寬甸縣) 청산구(靑山溝) 은광자촌(銀鑛子村)을 거점으로 하여 독립군 유격부대를 훈련시켰다. 그리고 수시로 국내로 진입하여 군자금을 모집하거나 일본 주재소를 습격하는 등의 항일투쟁을 이어나갔다. 1916년 10월 5일 조맹선·황봉운(黃鳳雲)·황봉신(黃鳳信)·김원섭(金元燮)·김일(金鎰)·김효선(金孝善)·한치현(韓致賢) 등 7명과 함께 영변군 팔원면 용성동(龍城洞)에서 잠복하고 있다가, 평양으로부터 운산금광으로 오던 송금마차를 기습 공격하였다. 그러나 송금마차의 배치순서가 변경되어 현금을 탈취하는 데 실패하였다. 하지만 송금마차를 호송하던 일제 순사들을 사살하고, 전원 무사 귀환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국내외에서 항일투쟁을 이어가자 일제는 한인 임곡(林谷)을 매수하여 의사인 것처럼 꾸미게 하고 중국 경내와 압록강 일대를 3년여 동안 조사하게 하여 거처를 파악하였다. 결국 1917년 5월 25일 콴뎬현 청산구 석가구에 있는 유계홍(劉桂洪)의 집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일본헌병대의 급습을 받고 붙잡혔다. 뤼순(旅順)으로 압송되던 중 동료 10여 명이 그를 탈출시키고자 호송대를 기습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황봉신과 황봉운 형제마저 함께 체포되었다. 1917년 12월 15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사형을 받았다. 1918년 5월 1일 평양감옥에서 형 집행으로 사망하였다. 이때 부인 우씨는 남편의 소식을 전해 듣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19년 3월 콴뎬현 청산구향(青山溝鄉) 구대구촌(舊大久村)에 그와 부인을 기리는 의열비가 건립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노상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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