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翊龍
崔翊龍1896. 11. 29 ~ 1923. 7. 2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국민회
- · 대한국민회군
포상 정보
- · 독립장(199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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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95) 1896년 11월 29일 함경북도 성진군(城津郡) 학상면(鶴上面) 오덕동(五德同)에서 최주학(崔周學)의 독자로 태어났다. 서울의 천도교중앙총부(天道敎中央摠部)에서 운영하는 교리강습소에서 수학하였으며, 이후 오성학교(五星學校)를 졸업하였다. 1913년 9월 7일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야간부 법경과(法經科)에 입학하여 1918년 3월 22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고 심리치료법을 전공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학(明治大學)에 입학하려다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북간도(北間島) 옌지현(延吉縣) 룽징촌(龍井村)으로 망명하였다.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가 조직되자, 여기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대한국민회에 가입한 것은 당시 북간도의 천도교인들이 쥐쯔제(局子街) 교구장(敎區長) 강구우(姜九禹) 외에 다수의 천도교인들이 본부와 지방회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것과 연관이 있었다. 대한국민회는 북간도국민회(北間島國民會)로도 불릴 정도로 북간도의 4개 현(縣)을 기반으로 하였으며, 회원은 약 8,000명이었다. 1920년 초에는 지회의 수가 80여 개에 이르러 당시 만주 지역 독립운동 단체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다. 독립전쟁을 추진하기 위해 홍범도(洪範圖)의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을 후원하였으며, 1920년 초에는 안무(安武)를 사령관으로 하여 직접 국민회군(國民會軍)을 조직하고 각 지회에 교관을 파견하여 독립군을 양성하는 등 만주에서 전개된 독립전쟁에 크게 기여하였다. 옌지현 수신향(守信鄕) 구세동(救世洞)에 위치한 서북지방회의 제3차 비서에 선임되어 회원과 군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에 주력하였다. 1920년 6월에는 대한국민회 비서관 겸 통신부장으로 활동하면서 경호부장의 명령을 받아 회원 이정국(李政國)·정세충(鄭世忠)에게 일제 관헌의 밀정 박생겸(朴生兼)의 처단을 지시하였다. 이에 이정국·정세충은 1920년 (음)5월 8일 오전 6시 박생겸을 룽징촌 베이꺼우(北溝)에서 5리쯤 떨어진 곳으로 끌고 가 처단하였다. 같은 해 8월 10일에는 대한국민회군 사령(司令), 안무의 부관(副官)으로 선임되어 사령관을 보좌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1년 3월 8일에는 신일묵(申一默)·전문(田文)과 함께 최재형(崔時亨)의 환원기도일에 참석한다는 명목으로 서울의 천도교중앙총부에 와서 북간도 지역의 천도교 현황과 금후의 포교 방침을 설명하고 교육기관의 설립 등에 관한 문제를 협의하였다. 이후 같은 해 3월 룽징교구에서 동흥학교(東興學校)를 설립하고 중학교와 소학교 학생을 모집하여 교육활동을 시작하자 교장 전만영(田晩永), 교감 최주영(崔周泳), 동양대학(東洋大學) 출신의 정중섭(鄭重燮) 등과 함께 교편을 잡고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교육 활동에 전력하였다. 1922년 봄 함북 성진으로 밀파되어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던 중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조사과정에서 일제 밀정을 처단한 사실이 드러나 기소되었다.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에서 재판을 받을 때, “어떤 이유로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는가?”라는 재판장의 질문에 “조선은 조선인이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되겠는 바 나는 중학 시절인 10년 전부터 이 희망을 가졌다”라고 답변하였다. 1922년 8월 11일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무기징역을 받았으나 항소하지 않았다. 청진형무소에 수감되어 옥고를 겪던 중, 1923년 7월 2일 동지들과 함께 탈옥을 시도하다가 간수의 총에 맞아 사망하였다. 유해는 그해 7월 20일 선편(船便)으로 고향인 성진에 도착하였으며, 지인과 천도교인들이 고향에 모셨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황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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