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秉準
趙秉準1862. 10. 2 ~ 1931. 10. 2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독립단
- · 대한광복군참리부
- · 의민부
포상 정보
- · 독립장(1963)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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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63) 1862년 10월 2일 평안북도 의주군(義州郡) 비현면(枇峴面) 체마동(替馬洞)에서 아버지 조승규(趙承奎)와 어머니 경주(慶州) 김씨(金氏)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후에 의주군 월화면 주음동으로 이주하였다. 본관은 풍양(豐壤)이고, 자는 유평(幼平), 호는 국동(菊東)이다. 13세인 1874년 의주군 월화면 진음동에 사는 평산 신씨와 혼인하여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다. 어렸을 때부터 부친으로부터 수학하여 10세 때부터 서당에서 한문을 본격적으로 공부하였다. 의주에서 권익형과 교유하면서 경의학(聖經) 연구와 토론을 거듭하였고, 평북 철산(鐵山)의 부호 오학민의 초빙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1892년 평북 태천(泰川)에 거주하는 운암(雲菴) 박문일(朴文一)에게 학문을 배우고, 충남 태안에 은거 중인 간제(艮齊) 전우(田愚)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1895년 일제가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하자 유인석(柳麟錫) 의병에 호응하여 장원섭(張元燮) 등과 평북 창성(昌城)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동하다가 2년간 옥고를 치렀다. 1898년부터는 처남 신우현(申禹鉉)이 운영하는 의주 월화방종교학교(月華坊宗敎學校)에서 교사로 일하면서 국문회사(國文會社)를 조직하여 경의학과 신학(新學)을 가르쳤다.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자 산포수(山砲手) 최원길(崔元吉) 등과 의병대를 조직해 창성헌병대를 습격하는 등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국내에서 활동이 불가능하게 되자 중국 펑톈성(奉天省) 관뎬현(寬甸縣) 장음자(長陰子)로 이동하였다. 이곳에서 만주로 망명한 의병장 백삼규(白三圭)·전덕원(全德元)·박장호(朴長浩)·조맹선(趙孟善) 등과 함께 농무계(農務契)·향약계(鄕約契) 등을 조직하여 동포들의 정착과 자치생활을 도모하면서 농병일치의 생활로 독립운동기지 건설과 전투력 배양에 힘을 쏟았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류허현(柳河縣) 싼위안푸(三源堡)에서 박장호·전덕원·백삼규 등과 함께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조직하여 참모부장으로 임명되었다. 대한독립단은 남만주 각지에 흩어져 있던 각 단체 대표 560여 명이 모여 각기 분립된 단체를 해체하고 독립 쟁취를 위해 단일기관으로 조직한 것이었다. 대한독립단은 국내외 모두 100여 개소의 지단과 지부를 설치하고, 만주지역에는 거류 동포 100호 이상을 구(區)로 하여 구관(區管)을 두어 10구에 단장을 두어 자치행정을 실시하였다. 또한 최고 1,500여 명의 병력을 유지하면서 그 중 700명의 독립군을 하얼빈(哈爾濱) 주둔 백계 러시아 부대에 파견해 한인청년부를 특설하여 군사훈련을 도모하고 러시아(露領)로도 2개 소대를 보내어 시베리아에서 훈련과 무기 구입에 주력하였다. 그 결과 12월에는 본부 밑에 4개 중대를 편성해 남만주 제1사단이라 하고 푸쑹현(撫松縣)에 사단본부를 설치하였다. 1919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연통제 실시에 따라 평북지역 연통제 도직원으로 임명되어 평북 독판(督辦)으로 활동하였다. 이와 함께 독립단 의주지국(義州支局)의 참모로서 독립군 양성을 위한 공채 모집과 평북 창성·의주 등지에서 지방 유력자·재산가·학교·종교 등에 대한 정보와 국내 정황을 임시정부에 통신하는 조사원으로 활동하였다. 한편, 대한독립단이 연호(年號) 사용문제로 기원독립단(紀元獨立團)과 민국독립단(民國獨立團)으로 분열되자, 신우현·변창근(邊昌根)·김승학(金承學) 등과 함께 민국독립단에 참여하여 민국 연호 사용을 주장하였으며, 단체의 도총재 직책을 맡기도 하였다. 같은 해 12월 만주에서는 각기 흩어져 있는 무장독립운동단체들의 통합 필요성이 본격화되었다. 평북 독판부의 김승만(金承萬), 대한청년단연합회(大韓靑年團聯合會) 안병찬(安炳瓚), 독립단의 대표 김승학 등과 함께 관뎬현 상루거우(香爐溝)에 모여 대한의용군사회(大韓義勇軍事會)·한족회(韓族會)·독립단·대한청년단연합회 등 남만주 일대의 각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하자는 데 합의하였다. 그리하여 1920년 2월 우선 각 단체와 통일적 연락을 취할 수 있는 기구를 관뎬현에 설치하고 김승학·안병찬·이탁(李鐸) 등에게 만주 대표단을 구성해 북만주 독립운동 정황 및 통일기관의 설치 필요성에 대하여 임시정부에 보고토록 하였다. 이에 임시정부에서는 광복군의 참리부(參理部), 사령부, 군영(軍營)의 설치가 결정되었고, 만주지역의 교민통치 및 군사기관으로 광복군 참리부와 사령부가 구성되어 관뎬현 안쯔거우(安子溝)에서 효율적인 무장활동을 전개하기 위한 광복군 총영(光復軍總營)이 발족하였다. 이때 대한광복군 참리부장(參理部長)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대한광복군 참리부장으로 그해 11월 임시정부와 연통을 통해 광복군 경비 부족에 대한 해결책 제시를 요구하며 군자금 조달과 모집방안에 대해 논의하는 등 독립군의 군수 조달에 전념하였다. 1921년 3월에는 임시정부 외교부에서 발행한 『구주(歐洲)의 우리 사업』이란 서적을 펑톈성성 관뎬현 숭정서사(崇正書社)로 송달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1922년에는 상하이(上海)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를 후원하기 위해 남만주에서 조직된 여러 통일회 가운데 평북 독판부(督辦府) 남만통일후원회(南滿統一後援會)를 조직해 회원과 회비 모집을 위한 활동을 펼쳤다. 이후 서간도의 민국독립단과 광복군 참리부 계열의 인사를 중심으로 신우현·김승학·백기준(白基俊) 등 10여 가호(家戶)와 80여 명을 인솔하여 내몽고 바오터우진(包頭鎭)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이주하였다. 중탄(中灘) 색등호노두(色登葫蘆頭 또는 烏拉特前旗 先鋒鄕 西垻頭)라는 곳에 정착하였다. 이들은 황무지를 개간하고 중국 국민정부의 알선으로 내몽고 서공기(西公旗)의 약 60만평에 이르는 땅을 15년 기한으로 조차하여 생활터전을 마련하였다. 배달농장(倍達農場)과 배달소학교(倍達小學校), 대종교수광지교당(大倧敎綏施敎堂) 등 한인촌을 건설하였다. 또한 이곳에서 의민부(義民府)를 조직해 총재로 활동하였다. 바오터우 지역의 한인촌을 중심으로 조직된 의민부는 그 자신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로, 대부분 평북 의주 출신이었다. 총무부장 김승학, 훈련부장 백기준, 교육부장 신언갑(申彦甲) 등은 제자들이었고, 의민부 부총재 신우현은 처남, 재무부장 조종서(趙宗瑞)와 부녀부장 조운명(趙雲明)은 자녀, 간사 오용덕(吳龍德)은 사돈이었다. 의민부는 임시정부와 직간접적으로 연계해 활동하였다. 특히 내몽고로의 이주와 정착과정에는 안창호(安昌浩)가 이주자금을 마련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제자인 김승학과 이탁 등을 상하이의 안창호에게 보내 독립운동과 관련한 문제들을 협의하였고, 김승학이 정간된 『독립신문』을 자금을 출자하여 운영하는 등 안창호계와 긴밀한 관련 하에 움직였다. 바오터우 정착 이후에도 임시정부와 지속적인 연락관계를 유지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농장의 수입금을 임시정부의 정부 자금과 교통연락비로 제공하였다. 김승학이 베이징(北京)에 있으면서 임시정부와 남북 만주의 비밀연락을 맡았을 때 독립운동 비밀문서와 함께 조병준의 문집 『흑초(黑草)』 원고를 김구(金九)에게 전달하였다고 한다. 또한 김구의 한국국민당에서 발행하고 있던 『한청(韓靑)』이란 잡지에 바오터우에 있는 인물이 몽암(夢巖)이란 필명으로 「투쟁과 진리」라는 글을 연재하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황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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