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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국

張泰國

1907 ~ 1933.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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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장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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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북 삭주(朔州)만주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북도 삭주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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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정의부(正義府)

포상 정보

  • · 애국장(199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5) 평안북도 삭주군(朔州郡) 삭주면(朔州面) 금오동(金五洞) 출신이다. 자료에 따르면 1907년생으로 추정된다. 7살이던 1914년 부친 장승호(張承浩)를 따라 서간도 콴뎬현(寬甸縣)으로 이주하였다. 1914년경 서간도는 민족운동지도자들에 의해 독립운동기지로 개척되던 시기였다. 부친은 이주 초부터 이 독립운동기지건설에 참여하였고, 이후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부친 장승호는 언제 무슨 단체에 참여해 독립운동을 시작했는지 자료의 한계로 밝히기 어렵지만, 1925년 상반기 정의부(正義府) 의용대 소속의 독립군이었다. 장승호는 그해 5월 유격대장이 되어 부하 2명과 국내에 진입해 활동하다 평북 의주군 고녕면(古寧面) 천마동(天摩洞)에서 일제 경찰대와 교전 중 전사하였다. 이 같은 부친의 영향을 받아 21세이던 1927년 (음)8월경 거주지인 콴뎬현 유황구(柳黃溝)에서 정의부 지방조직의 보안대원(保安隊員)이 되었다. 정의부 지방 조직 중 가장 큰 단위는 1,000호(戶)를 담당하는 총관(總管)인데, 이 시기 콴뎬현에는 2개의 총관이 있었다. 콴뎬현 동쪽 지방과 봉황성(鳳凰城)을 담당하는 관동(寬東)총관, 콴뎬현 서쪽 지방과 안동현(安東縣, 현 단동시(丹東市))을 담당하는 관서(寬西)총관이었다. 콴뎬현 동쪽에 위치한 유황구의 위치로 본다면 관동총관 소속의 보안대 대원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정의부는 중앙에 의용대를 편성해 독립전쟁을 수행했고, 만주내 지역 한인사회에는 모연대(募捐隊) 또는 보안대를 조직해 무장활동을 펼쳤다. 모연대는 만주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임무를 수행하였고, 보안대는 지역 한인 사회의 안위를 지키는 무장대였다. 이 보안대는 보안대장 밑에 부사(副士), 참사(參士), 상등병(上等兵), 일등병(一等兵) 등의 계급을 가진 대원이 한 계급 당 2명에서 5명까지 임명되었다. 그리고 인원이 부족할 때는 계급이 주어지지 않았지만 활동에는 참가하는 무등병도 보충되었다. 이 같은 형태로 20명 정도의 인원이 하나의 보안대를 이루어 지역의 안위를 지켰다. 그런데 보안대는 지역의 안위를 지키는 업무만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할 경우 모연대와 합동으로 군자금 모집에 나서기도 하고, 총관내 행정조직인 검무원과 한인 사회를 돌며 의무금 징수 활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이런 여러 업무가 가능했기에 1927년 11월 초순경에는 유황구 한인사회를 돌며 십가장(十家長)들을 만나 한인들에게 의무금을 징수하도록 권유하였다. 그리하여 중국화폐 대양전(大洋錢) 12원을 징수해 검무원을 통해 중앙에 납부하도록 하였다. 십가장은 한인가옥 10호를 담당하는 정의부 지방행정조직의 최하급 간부였다. 만주에서 보안대 활동을 하다 이듬해인 1928년 10월 같은 정의부 대원인 박춘엽(朴春葉)과 국내로 들어와 평북 의주군 옥상면(玉尙面) 북사동(北社洞)에 정착하였다. 이는 정의부의 국내 거점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일제 경찰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광부로 취직하였다. 그리고 동지 박춘엽과 치밀한 작전 계획을 세워 친일 부호의 집을 기습해 군자금을 모집해 정의부 본부로 보냈다. 이러한 활동을 1933년 상반기까지 이어 갔다. 1930년이 되면 정의부는 없어지고, 구성원들 대부분이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에 소속된다. 따라서 자연 조선혁명군 소속이 되었다. 1932년 12월, 날씨가 추워 일제의 경계가 소홀해진 것을 이용해 동지 박춘엽과 더욱 활발히 군자금 모집에 나섰다. 해를 넘겨 1월 하순까지 친일 부호의 집 6가구를 기습해 300여 원의 군자금을 모집해 만주로 보냈다. 그러나 이 같은 활동이 일경의 감시망에 포착돼 1933년 3월 13일 일제의 옥강(玉江)주재소 경찰대에 붙잡혔다. 주재소에서 일제 경찰들의 심문을 받다가 3월 14일 새벽이 되었다. 새벽 4시 50분경 동지 박춘엽이 화장실에 가겠다고 하자 당직인 일본인 순사 하기모토(萩元)가 함께 동행하였다. 그 둘이 돌아 올 때 재빨리 책상위에 있는 하기모토의 권총을 들고 방아쇠를 당겼다. 하기모토는 단 한발에 절명하였다. 총소리를 듣고 취침중이다 달려 나온 또 한명의 일본인 순사 다카하시(高橋)를 향해서도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황급히 권총을 조작하다 안전핀이 닫히는 바람에 총알이 나가지 않았다. 결국 다카하시와 육탄전을 벌이다 유리창에 다리가 끼는 바람에 많은 구타를 당한 뒤 붙잡혔다. 육탄전 와중에 동지 박춘엽은 피신해 압록강을 넘어 콴뎬현까지 갔으나 사흘 후인 17일 다시 붙잡히게 되었다.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사형을 받아 항소했으나 1933년 9월 29일 평양복심법원에서 또 다시 사형을 받았다. 이에 다시 고등법원에 상고해 기다리던 중 1933년 10월 10일 오전 1시 5분 급성폐렴에 의해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채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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