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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신국

張信國

1902. 8. 21 ~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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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장신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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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남 대동(大同)만주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남도 대동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대한민국임시정부
  • · 청년동맹회
  • · 정의부
  • · 국민부
  • · 조선혁명당
  • · 조선혁명군

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6
  • · 10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1) 1902년 8월 21일 평안남도 대동군(大同郡) 금제면(金祭面) 상지리(上地里) 에서 태어났다. 이명(異名)은 장일(張一) 혹은 장일한(張一漢)이다. 국내에서는 평양부(平壤府) 신양리(新陽里)에 거주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에 참여하였으며, 같은 해 6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장(議長) 손정도(孫貞道)의 권유로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독립신문』 사원으로 활동하였다. 11월에는 임시정부 평남 대동군 조사원으로 활동했으며, 주로 해당 지역의 자산가(資産家), 유력자(有力者), 학교 및 종교 등의 현황을 조사하여 임시정부에 보고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후 상하이 인근의 상주(常州)로 가서 임시정부가 세운 사관학교(士官學校)를 졸업하였으며, 1923년 다시 상하이로 와서 상하이상과대학(上海商科大學)을 다니며 임시의정원 서기(書記)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12월 상하이지역 독립운동단체인 청년동맹회(靑年同盟會)에 가입하였으며, 1926년 4월 집행위원이 되었다. 1925년 10월 10일에는 상하이 유학생회(留學生會)가 삼일당(三一堂)에서 개최한 신입생환영회에서 사회를 보았으며, 유학생회 내에 사교부(社交部)를 설치하고 집행위원장으로 유학생 사회의 친목도모와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노력하였다. 사교부에서는 주로 중국의 학생단체와 서로 연락을 취하고 상해로 유학 오는 조선인 학생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며, 기관지 등의 발행을 통해 그 세력을 확장했다. 주로 이화천(李花天)·곽병덕(郭炳德)·김성휘(金成輝), 김종필(金鍾弼)·정재승(鄭在昇)·이범홍(李範洪)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25년 12월 1일에는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 서거(逝去) 일주월(一週月) 추도식(追悼式)에 참가하였다. 추도식은 상해지역 8개 단체 주최로 삼일당에서 개최되었는데 사회는 김규면(金圭冕), 약력 보고는 안공근(安恭根), 추도문 낭독은 동아일보사(東亞日報社) 특파원 조덕진(趙德津)이 담당하였다. 이때 윤자영(尹滋英)·김상덕(金尙德) 등과 함께 눈물의 추도 연설을 했다고 한다. 1926년 1월 10일에는 청년동맹회(靑年同盟會) 내에 벽신문사(壁新聞社)가 조직되자 편집대표로 활동하며, 신문발행을 주도하였다. 신문은 10일 간격으로 발행되었으며, 레닌의 죽음을 기념하여 제호를 ‘레닌 벽신문’이라고 하였다. 주로 세계의 노동운동과 약소민족의 독립운동을 소개했는데 그 내용이 매우 충실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1926년 5월 30일에는 독립정신사원(獨立精神社員)으로 순종의 장례식을 기해 국내 각 단체를 일원화(一元化)하는 동시에, 6·10만세운동 등의 조직적 확산을 위해 이화천과 함께 국내로 들어오던 중 붙잡혔다. 5월 17일 상해를 출발한 이들은 만주 평톈(奉天)에서 평양으로 오는 급행열차를 타고 국내로 들어왔으나 평양역에서 평양경찰서 형사들에게 체포되었다. 31일 열차편으로 서울 본정(本町)경찰서로 압송되어 조사를 받았다. 6월 19일에 경성지방법원 검사국(檢事局)으로 넘겨져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어 21일에 첫 공판을 받았다. 재판 과정에서 독립운동 전개 사실에 대해 “조금도 은닉함 없이 쾌활하게 답변하여”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9월 23일 징역 2년이 선고되었고, 10월 5일 징역 1년으로 형이 확정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출소 후 1928년 7월 만주로 망명하였으며, 평톈성(奉天省) 신빈현(新賓縣) 하남가(河南街)에 주소를 두고 민족진영의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正義府)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신빈현 왕청문(旺淸門)에 있던 정의부 소속의 화흥학교(化興學校)에서 교사로 재직하며 한인 청소년들의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노력하였으며, 1929년 5월에는 같은 학교의 교장에 취임하였다. 1930년 5월 8일에는 왕청문에서 개최된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대회에 참가하여 중앙집행위원(中央執行委員)에 피선되었으며, 1931년 12월까지 조선혁명당 교양부장(敎養部長)으로 민족진영의 문화·노동·투쟁교육에 기여하였다. 조선혁명당은 삼부통합운동(三府統合運動) 이후 정의부 주도세력이 조직을 변경하여 결성한 국민부(國民府)의 지도 정당이었다. 정의부에서 활동하다가 1929년 4월 국민부가 결성되자 곧바로 이에 가담했던 것으로 보인다. 1932년 9월 20일에는 조선혁명군 속성군관학교의 교관으로 독립군의 양성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때 군관학교의 교장은 조선혁명군의 총사령(總司令) 양세봉(梁世奉)이 직접 맡았으며, 참모는 윤동훈(尹東勳)이었고 교관으로는 홍익선(洪益善)·임필순(任弼淳) 등이었다. 그러나 만주사변 이후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내에서 민족진영의 항일무장투쟁의 역량 강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던 와중에 1932년 12월 초 김영길(金永吉)·나형룡(羅亨龍)·강춘봉(姜春逢)·강철환(康哲煥)·이훈호(李勳浩)·윤식변(尹植邊)·최운하(崔雲河)·유인준(劉仁俊) 등과 함께 거주지에서 일제 경찰에 의해 붙잡혔다. 이후 신의주경찰서로 압송되어 조사를 받았으며, 12월 13일에 신의주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1933년 1월 23일 신의주지방법원 형사법정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았으며, 1933년 2월 2일 징역 5년을 받았다. 옥고를 겪던 중 옥중에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황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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