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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化周

化周

1899. 3. 23 ~ 192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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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化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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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북 초산(楚山)만주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북도 초산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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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대한통의부
  • · 참의부

포상 정보

  • · 독립장(1963)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3) 1899년 3월 23일 평안북도 초산군(楚山郡) 풍면(豊面) 용당동(龍塘洞)에서 태어났다. 1919년 만세운동 이후 만주로 망명하였으며,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지안현(輯安縣) 유수림자(楡水林子)에 거주하였다. 1922년 만주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에 가담하였다. 그해 8월 6일 통의부의 문학빈(文學彬)·김종호(金宗浩)·송익순(宋益淳)·정봉빈(鄭奉彬) 등 13명의 대원과 함께 국내로 진입하여 강계군(江界郡) 고천면(高川面)의 고산진경찰관주재소(高山鎭警察官駐在所)를 습격하여 순사 2명을 사살하고 동리(洞里) 장봉빈(張鳳彬)·박형제(朴亨濟) 등의 집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1923년 6월에는 전용휴(田龍畦)·백운기(白雲基)·김석홍(金錫弘)·한권웅(韓權雄)·박제환(朴濟煥)·이선택(李善澤) 등과 같이 강계 방면으로 진출하여 어뢰면(漁雷面) 일본경찰관주재소를 습격·소각하였다. 8월 21일에는 이의준(李義俊) 및 동지 5명과 함께 강계의 풍청동(豊淸洞) 하청참(河淸站)의 경찰 임시출장소를 습격·소각하였다. 이 과정에서 주재소를 지키던 경찰관 1명을 총으로 사살하였으며, 주변 9채의 민가를 불태웠다. 1923년 9월 참의부(參議府)가 결성되자 장기초(張基楚)의 휘하에서 참사(參士)로 활동하였다. 1924년 4월 1일에는 육군군사회의(陸軍軍事會議)의 명의로 발표된 「남만(南滿)의 군민에게 경고함」이라는 선언문에 제1중대 대표의 일원으로 서명하였다. 선언문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직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것, 대동통일의 선봉이 되어 내외를 막론하고 임시정부의 기치 아래 통일시키는 데에 적극적으로 힘쓸 것 등을 주장하였다. 이 선언문은 기본적으로 참의부가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와의 이념 갈등을 끝내고 임시정부 직할 항일부대로서의 역할을 다할 것을 천명한 것이었다. 1924년 5월경에는 7명의 대원을 이끌고 국내로 들어와 강계 방면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때 친일분자 이길상(李吉祥)의 밀고로 일제 경찰에 포위되는 위기를 맞기도 하였으나 분전(奮戰)하여 이를 돌파하고 하루를 행군하여 문옥면(文玉面) 총면동(總面洞)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독립군을 체포하기 위해 길목을 지키고 있던 일제 경찰 2명을 처단하고 무사히 귀환하였다. 이에 대해 『독립신문』에서는 일제 경찰이 독립군 선발대 안정길(安貞吉)과 양봉제(梁鳳濟)의 행동을 수상히 여겨 다가서자 태연히 2~3m를 접근하여 권총을 발사하여 1명을 사살하였으며, 곧이어 뒤따르던 독립군부대도 총을 쏘아 다른 한 명도 사살했다고 보도하였다. 1933년 2월 다시 국내에 들어와 활동 중 평북 만포(滿浦) 경찰서에 붙잡혀 조사를 받았으며, 2월 18일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등으로 신의주지방법원 강계지청으로 압송되었다. 1933년 10월 20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을 구형받았으며, 같은 달 24일 징역 13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황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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