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鴻來
鴻來1888. 10. 29 ~ 1943. 7. 16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중광단
- · 대한정의단
- · 북로군정서
포상 정보
- · 독립장(1963)
관련 사건
- · 을사오적 처단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3) 1888년 10월 29일 서울 종로구 견지동(堅志洞)에서 아버지 이병의(李秉宜)와 어머니 장씨(張氏)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원적은 함경북도 회령(會寧)이며,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자(字)는 윤선(允善)이고, 호는 성제(省齊), 이명은 이일추(李一秋)·김등(金藤)이다. 형은 이중래(李重來)이고, 동생은 이강래(李康來)·이학래(李鶴來)이다. 6척(六尺) 거구의 건장한 체격과 활달하고 패기있는 성격으로 무관(武官)의 자질을 갖추었다고 한다. 대한제국 경무청(警務廳)에 근무하면서 총순(總巡)의 지위에 올랐으며, 민영환(閔泳煥)의 경호를 담당하였다. 1905년 민영환이 자결 순국하자 사직하였으며, 국권회복에 뜻을 두고 의병을 규합하고자 노력하였다. 1907년 1월 나인영(羅寅永)·오기호(吳基鎬)·김동필(金東弼) 등이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처단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적극 가담하였다. 거사는 3월 25일 아침 5개 조로 편성된 주참대(誅斬隊)가 을사오적이 출근하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일제히 공격하여 처단하기로 하였다. 나인영·오기호는 광화문 밖에서 출근하는 참정대신 박제순(朴齊純)을, 다른 인원들은 각각 돈의문(敦義門) 앞에서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을, 합동(蛤洞) 비교(圮橋) 부근에서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을 처단하기로 하고 거사에 착수하였다. 이에 동지 강원상(康元相)과 함께 권총을 소지하고 사동(寺洞)에 있는 군부대신 권중현(權重顯)의 집 앞에서 몸을 숨기고 있다가 출근하기 위해 인력거에 오르는 권중현을 처단하고자 하였다. 권중현의 멱살을 잡고 격투 중, 강원상이 권중현에게 권총을 발사하였으나 적중하지 못하였으며, 권중현은 재빨리 도망갔다. 이즈음 총소리를 듣고 일제 군경이 출동하고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거사는 실패하였다. 거사 이후 일제의 감시망이 좁혀오자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1년 만주에서 중광단(重光團)이 조직되자 이에 참가하였다. 중광단은 대종교의 서일(徐一)·계화(桂和)·채오(蔡五)·양현(梁玄) 등이 국내에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다 만주로 망명하여 결성한 단체였다. 주로 청년들에게 애국교육과 대종교를 통한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노력하였는데, 국내에서 이미 대종교계의 중심인물들과 함께 을사오적의 처단을 위한 거사에 참여한 관계로 자연스럽게 가입한 것으로 보인다. 1919년 만세운동 이후 중광단이 보다 적극적인 항일무장투쟁의 전개를 위해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으로 재조직되자 이에 참여하여 기관지 『일민보(一民報)』를 발행하고 이주 한인들의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하였다. 1919년 12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가 결성되자 제4중대장 및 모연대장(募捐隊長)이 되었으며, 국내로 들어와 회령·무산(茂山) 등지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 등을 펼쳤다. 1920년 2월경 임태순(林泰淳)·김인순(金寅淳)·김명호(金明浩) 등과 함께 회령군의 자산가 김정균(金楨均)을 체포하여 간도(間島) 증산곡(甑山谷)의 초가에 감금한 후 그의 동생 김희균(金熙均)으로부터 약 6,000원 가량의 군자금을 러시아 화폐로 받아냈다. 그해 3월 하순에는 일제의 관공서를 파괴하는 동시에 관헌을 사살하였으며, 무산군에서 수차례에 걸쳐 군내 각지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였다. 또한 지린성(吉林省) 옌지현(延吉縣)에서도 김모(金某)로부터 550원의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이 밖에도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士官鍊成所)의 설립과 발전을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에 참가하였으며, 미샨(密山)에서 결성된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에도 참여하였다. 1921년 8월 서일이 사망한 후에는 위기에 처한 독립군부대를 수습하며, 미샨현 바이바오쯔(白抱子)를 근거지로 하여 활동하였다. 1921년 9월 이후에는 옌지현으로 이동하여 먀오거우(廟溝, 일명 明月溝) 구세촌(救世村)에 거점을 마련하고 활동하였는데 둔화현(敦化縣)과 왕칭현(汪淸縣)까지 분대 또는 연락소를 설치할 수 있을 정도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개최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 ◯ ◯귀일당(◯◯歸一黨) 대표로 참석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1924년 4월에 강기성(姜基成)과 함께 하얼빈도외17도구(哈爾濱道外十七道溝)에서 밀정 처단 및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던 중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이에 대해 『독립신문』에서는 “이왕에 북로군정서 모연대장으로 비상(非常)한 노력을 하고 오늘까지 열렬하게 독립운동을 해오던 그가 일제의 영사관 고등정탐부장 쿠니요시(國吉精保)가 지휘하는 경찰에 의해 다른 동지 1명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중국 관헌(官憲)에 대해 통지도 없이 경찰을 이끌고 와서 2인을 체포해 간 것에 대해 중국관청에서는 위법인 줄 알면서도 항의조차 하지 않아 하얼빈의 중국인사들이 분개하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1925년 4월 24일 청진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과 폭발물취체규칙 위반 등으로 징역 10년을 받자, 경성복심법원 항소하였으나 기각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황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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