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君明
韓君明미상 ~ ?
관련 단체
- · 대한국민의회
- · 대한독립군단
- · 대한민국임시정부
포상 정보
- · 애족장(2012)
관련 사건
- · 대한국민의회(블라디보스토크
- · 니콜리스크) 니콜리스크한인회(최재형)
- · 의용군편성
- · 무장독립투쟁 3.1독립선언기념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12) 자료의 한계로 출신지와 출생시기는 알 수 없다. 이명은 창해(滄海), 애골, 한(韓)에골 페트로노비치다. 일찍이 부모와 함께 러시아로 이주하여 블라디보스토크(Владивосток)와 니콜리스크(Никольск)에서 활동하였다. 1919년부터 1921년까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와 니콜리스크 등에서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의장서리 및 회장, 노동재무부장 등을 역임하면서 의용군 편성, 무장독립투쟁 참여, 3·1독립선언 기념 시위 등을 주도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한 한일병합 이후 국내에서의 무장 투쟁에 곤란을 느낀 의병들이 만주(滿洲)와 서간도(西間道), 노령(露領) 등지로 망명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하고 지속적인 독립군 양성과 무기조달, 군자금 마련 등에 힘쓰는 한편, 국내·외의 무장 투쟁과 연동하여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1919년 1월경 니콜리스크에서 러시아노농정부(勞農政府) 집정관 중 한 명인 아우크센체프로부터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을 제의받고, 러시아를 중심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던 최재형(崔在亨) 등과 논의하여 재러한인대표로 2명의 위원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할 것을 결정하였다. 같은 해 2월경 블라디보스토크의 김진(金震)과 명동학교장 김약연(金躍淵) 등 각 지방의 한국인들을 소집할 때 블라디보스크에서 함께 회합하여 임시정부 중앙기관의 창설과 정부 당국자의 인선 등을 논의하였다. 1919년 4월 상하이(上海)에서 항일독립운동의 중심단체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같은 달 28일 블라디보스토크 한민학교(韓民學校)에서 최재형·김철훈(金喆勳) 등 전로한족회중앙총회(全露韓族會中央總會)를 중심으로 한 대한국민의회 임원들과 회합하여 임시정부의 승인문제를 논의하고 임시정부의 러시아 이전 계획 및 의회 조직 건에 관해 논의하였다. 1919년 5월경 러시아 니콜리스크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였고, 같은 해 12월 대한국민의회 임시총회에서 문창범(文昌範)의 뒤를 이어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20년 2월 대한국민의회 의장서리로 선출되어 의용군(義勇軍)을 편성하고 조장원(趙璋元) 등과 함께 대한국민의회 회장으로서 신한촌의 유력자 및 각 단체 대표자들과 회합한 후 3·1독립선언기념회 거행 계획 수립과 포고문 작성 등 3·1독립선언 기념 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1920년 4월 시베리아로 출병한 일본군은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을 습격하고 니콜리스크에서 재러한인들을 소집하여 시가전을 벌여 대한국민의회 회장 최재형 등 90여 명을 사살하였다. 이때 전 러시아 육군소장 출신 김인수(金仁洙)·한 안드레이와 함께 무루나이구베스케에서 노동자 등을 결집하였다. 같은 해 9월 블라고베셴스크(Благовещенск)에서 대한국민의회 노동재무부장으로서 문창범 등과 함께 무기와 탄약 등을 입수하여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1920년 10월 대한인국민회 평의원으로 활동하던 중 같은 해 겨울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등의 승리 이후 일본군의 공세에 대응하기 위해 만주 지역 독립군의 노령 이동 문제가 논의되자, 문창범·오하묵(吳夏默) 등과 하바롭스크(Хабаровск) 소재 제2군단과 교섭을 진행하였다. 1921년 1월부터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등 각 독립군 부대가 연합한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이 이만(Иман)으로 이동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같은 해 2월에는 하바롭스크에서 독립운동 자금 모집과 밀정 처단, 무장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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