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燦植
崔燦植1891 ~ 1926. 1. 14
관련 단체
- · 솔밭관 한족공산당
포상 정보
- · 애족장(2006)
관련 사건
- · 솔밭관 한족공산당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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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06) 자료에 따르면 1891년생으로 추정된다. 자료의 한계로 출신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명은 한자가 다른 최찬식(崔贊植)과 최창석(崔昌錫)이 있다. 연해주 지역에서 항일무장 독립운동 단체 조직에 참여하였고 한족공산당연해주연합총회(韓族共産黨沿海洲聯合總會, 일명 ’솔밭관 한족공산당‘)의 간부로 선임되어 러시아 내 한인들의 항일무장독립운동에 앞장섰다. 1920년을 전후하여 한인 청년과 지식인들은 민족해방을 위한 새로운 지도이념으로 사회주의 사상을 급속하게 수용하였다. 사회주의 운동은 민족해방운동의 중심적 경향 중 하나로 자리 잡게 되었다. 러시아 내전이 이어지고, 1920년 4월 일본군에 의한 ‘4월참변’ 등으로 인하여 피해가 발생한 상황 속에서 러시아 연해주 남부지역인 추풍(秋風) 구역에서도 공산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한인빨치산군대가 창설되었다. 1920년 6월 5일 추풍 구역 당어재골(唐於子溝) 신길동(新吉洞, 푸칠로프카(Пуциловка)로부터 서남쪽으로 약 2리)에 위치한 최형식의 집에서 최문서(崔文瑞)·황원호(黃元浩) 등 14명과 회합하고 지방대를 조직한 후, 모병에 힘썼다. 그 결과 기존에 솔밭관에 조직되어 있던 지방대 조직인 ‘신길동청년회’를 ‘우리동무군’으로 개칭하였다. 그해 7월 개최된 임시총회에 유진구(柳震九)·이중집(李仲執)·황원호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임시총회에서는 일본군에 의한 ‘4월참변’에 비추어 볼 때 무력에 의한 단순한 독립운동은 불가능하므로, 공산주의를 표방해 러시아 공산당과 공명하는 것이 세력을 확장하는 데 유리하다고 결론짓고 연해주한족공산당 조직이 결정되었다. 그 결과 1920년 8월 결성된 솔밭관 한족공산당의 군정의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솔밭관 한족공산당은 결성 직후 산하 무장단체인 ‘우리동무군’을 ‘공산주의군’으로 개칭하고 백위군과 러시아에 진출한 일본군을 상대로 무장투쟁을 이어나갔다. 1920년 10월 일제가 이른바 ‘훈춘사건(琿春事件)’을 명분으로 중국 만주지역을 침공하자, 만주 지역에 있던 많은 한인 부대들이 러시아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과 한민회(韓民會)·의군부(義軍府) 간부와 군인들이 솔밭관 한족공산당 산하 공산주의군에 대거 가담하였다. 이에 조직문제를 토의하기 위하여 1921년 2월 초 개최한 ‘전체군대 총회’에 참여하여 상의위원(常議委員)으로 집행부(執行部) 비서(秘書) 및 재정부(財政部) 부장(部長)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22년경 5월경 총사령부장 최문서(崔文瑞) 등과 일하면서 솔밭관 한족공산당 총사령부 참모부(參謀部) 무기과장(武器課長)을 역임하였다. 그해 8월 31일 러시아공산당 연해주 간부의 결정으로 솔밭관 한족공산당이 ‘러시아공산당 포시예트-훈춘구역 간부’로 개칭되자, 조직과장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러시아 내전에서 러시아 빨치산 및 적군과 협력해 백위파·일본군 등 연합군과 싸운 러시아 한인 무장부대들은 1922년 11월 10일 원동공화국 인민혁명군 총사령관 우보레비치(Иероним Петрович Уборевич)의 명령으로 일본군의 철수 후인 11월 15일부터 24일에 걸쳐 무장해제 되었다. 무장해제 이후 흩어진 동지들을 규합하고, 직접 50여 명의 부대를 지휘하여 위원장 이중집, 신우여(申禹汝) 등 솔밭관 한족공산당 간부들과 함께 연락하면서 항일 무장투쟁을 이어나갔다. 1925년 7월경 블라디보스토크 공산학교 학생으로 수학했다고 알려져 있고, 같은 해 12월 그로데꼬브구역 계몽소의 교사로 활동하던 중 병환으로 1926년 1월 14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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