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병옥
張炳玉1914. 8. 22 ~ 1947. 8. 1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광고미술사
- · 공산주의자협의회
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05)
관련 사건
- · 왜관 항일비밀결사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건국포장(2005) 1914년 8월 22일 경상북도 칠곡군(漆谷郡) 인동면(仁同面) 인의동(仁義洞, 현 구미시 인의동)에서 아버지 장필상(張泌相)과 어머니 광주(廣州) 이씨의 4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이명은 장개돌(張介乭)이고,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우헌병옥(友軒炳玉)을 썼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후손이며, 조부 장두원(張斗遠)은 1908년 인동에서 사립 인흥학교(仁興學校)의 설립에 참여하였고, 부친은 인흥학교의 교사로 활동하였다. 선산(善山) 김씨와 결혼해 슬하에 2남을 두었다. 1936년 6월 무렵 칠곡에서 최소복(崔小福)·정칠성(鄭七星)·이영석(李寧錫)이 주도한 항일 비밀결사에 가입하였다. 이 비밀결사는 적색농민조합의 조직과 조선공산당 재건, 궁극적으로 한국의 독립을 목표로 하였다. 이들은 적색농민조합을 결성하기 위해 먼저 농민의 권익 옹호를 실현하면서 농민의 의식을 고양시키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일제의 관제농민운동의 일환으로 설립된 농촌진흥조합과 조합이 운영하는 야학을 활용하여 농민을 계몽시킨 후 동지로 규합하고자 하였다. 또한 1937년 일제가 일으킨 중일전쟁을 침략전쟁으로 규정하고, 일제의 패전을 위해 후방을 교란시키는 반전반제운동을 전개하였다. 나아가 한국인의 생활을 사수하고 독립운동을 펼친다는 목표를 세우고 활동하였다. 1937년 4월 무렵 서울에서 김우현(金禹鉉)이 주도해 설립한 광고미술사(廣告美術社)에 최소복과 함께 참여하였다. 광고미술사는 일본 도쿄(東京)에서 프롤레타리아 연극 활동을 해온 김우현의 활동과 관련이 있었다. 1936년 1월 귀국한 김우현이 인민전선전술에 입각한 프롤레타리아 연극운동을 전개하여 민족개량주의 극단인 경성극연구회를 와해시키고, 1936년 8월에 조선연극협회를 조직하였다. 조선연극협회는 프롤레타리아 연극의 상연을 통하여 대중들에게 독립의식과 계급의식을 높이고, 조직의 확대 강화에 노력하였다. 이 과정에서 당면한 생활방법을 강구하고 프롤레타리아 연극운동을 펼치기 위해 광고미술사가 설립되었다. 1937년 4월 하순에는 공산주의자 이정업(李定業) 등과 제휴하여 실천기관으로 공산주의자협의회를 결성하였다. 그리고 총책임 겸 노동부는 최소복, 조직책임 겸 소시민부는 이정업, 영화부는 추완호(秋完鎬), 상업부(간판)는 조이연, 조사책임 겸 미술부는 강윤희(姜潤熙), 연락 겸 책임부는 김우현 등이 맡기로 하자, 선전책임 겸 소시민부를 담당하였다. 이후 회원들과 함께 사회과학 서적을 읽는 등 자체 교양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6월 일제가 조선연극협회의 해산을 명령하고, 광고미술사도 경영의 어려움을 겪어 더 이상 활동을 이어가지 못하였다. 1938년 2월경 칠곡에서 활동하던 비밀결사가 발각되면서 왜관경찰서에 붙잡혔고, 대구경찰서로 이첩되었다. 이후 약 2년 동안 미결수로 있다가 1941년 3월 예심을 거쳐 재판에 넘겨졌다. 1942년 2월 23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아 옥고를 겪었다. 1945년 광복 이후 칠곡에서 좌익계열 활동을 하면서 남조선노동당 칠곡군위원회 부위원장과 위원장을 지냈다. 1946년 10월 2일과 3일 사이에 칠곡에서 일어난 ‘10월사건’ 관련으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다가 1947년 6월 23일 풀려났다. 그해 9월 하순 미군정 「법령 제19호」 위반으로 대구지방검찰청에 의해 기소되었으며, 같은 해 9월 24일 감옥에서 사망하였다. 한편, 1947년 8월 1일에 사망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허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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