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두환
張斗煥1894. 9. 6 ~ 1921. 4. 28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광복회
포상 정보
- · 독립장(1963)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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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63) 1894년 (음)9월 6일 충청남도 천안군 환성면(歡城面) 삼룡리(三龍里, 현 천안시 삼룡동)에서 태어났다. 집안과 성장배경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바가 없다.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 충청도지부 책임자 김한종(金漢鍾)의 권유로 대한광복회에 가입, 회원 모집과 군자금 모집, 도고면장 박용하 처단 의거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17년 8~9월경 김한종으로부터 “광복회는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중국에서 조선에 있는 부호들에게 포고문을 발송해 금전을 각출하게 하여 모집하기로 했다”라는 취지와 운동방략을 듣고 동감하여 대한광복회에 가입하였다. 1917년 10월 23일 김한종의 집에서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朴尙鎭)과 회합하여 운동방략을 논의하였다. 이 자리에서 박상진으로부터 “중국 서간도 지역에서 광복회를 위해 활동할 것”을 부탁받았으나 부모님 부양 문제로 거절하고 다른 방략을 강구하였다. 그 방편으로 국내에서 무기 구입비 2,000원을 조달하기로 약속하고, 충청남도 내 자산가들을 조사하여 군자금을 확보하기로 했다. 이에 천안, 아산, 안성, 연기 지역의 부호를 조사하기로 했는데, 서산, 홍성, 예산, 보령 지역은 김한종이, 공주, 청양, 부여, 논산 지역은 엄정섭(嚴正燮)이 맡기로 하였다. 조사한 부호의 명단을 취합한 후 백지에 소금물로 인명부를 만들었으며, 같은 해 10월경 서울 남대문 인근 남문여관(南門旅館) 어재하(漁在河)의 방에서 박상진에게 전달했다. 박상진은 이것을 우재룡(禹在龍)에게 전달하였다. 우재룡은 이것을 토대로 충청남도 보령군 청라면(靑蘿面) 이석구(李錫九)에게 100,000원을 기재했으며, 충청남도 내 자산가 20여 명에게 각기 출금액을 기재한 포고문(怖告文)을 작성한 후 중국으로 건너가 1917년 12월 29일에서 1918년 1월 3일 사이 안둥현(安東縣, 현 단둥시)과 펑텐(奉天, 현 선양) 등지에서 국내로 발송하였다. 한편 우재룡이 저당 잡힌 권총을 찾기 위해 김한종에게 200원을 마련해 주고, 이후 400원, 300원, 1,300원 등 여러 차례 군자금을 박상진에게 전달하였다. 군자금 모집뿐만 아니라 김한종과 함께 충청남도 각지를 다니며 대한광복회 회원 확보에도 노력하였다. 그 결과 강석주(姜奭周), 김경태(金敬泰, 이명 김영근(金永根)), 김상준(金商俊), 김원묵(金元默), 김재창(金在昶), 김재철(金在哲), 김재풍(金在豊), 성달영(成達永), 유중협(柳重協), 유창순((庾昌淳)), 이재덕(李在德), 정우풍(鄭雨豊), 정태복(鄭泰福), 조종철(趙鍾哲), 황학성(黃學性) 등 지역 내 유력 인사들을 광복회에 가입시켜 60여 명에 이르는 회원을 확보하였다. 이로써 대한광복회 충청도지부의 외연을 확대하여 지역 내 독립운동을 고양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1917년 11월 25일 지역 인사 김재창이 방문하자 김재창을 광복회에 가입시켰다.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대한광복회의 취지와 “중국 동삼성(東三省)에서 대대적으로 병사를 양성하고 무기를 구입하여 병력으로 그 목적을 달성”하려는 운동방략을 설명하여 동의를 얻었다. 그리고 김재창에게 김경태, 엄정섭 등과 함께 부호의 집에 잠입, 군자금을 모집할 것을 지시하였다. 원래 그 자신의 토지를 매각하여 군자금을 조달하고자 했으나, 급히 구입하는 자가 없어 부호들에게 자금을 모집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 같은 해 12월 19일 천안 삼거리 인근에 모여 구체적 실행 방법을 모색, 아산군 부호 장용숙(張容淑)에게 군자금을 수취하고자 하였다. 12월 21일 조종철에게 장용숙의 집에 현금보유 여부를 살피게 하고, 김재창과 김경태, 엄정섭에게 권총 2정을 지급하여 실행을 지시했다. 다음날 22일 오후 9시경 세 사람이 아산군 배방면(排方面) 중리(中里, 현 아산시) 장용숙의 집에 잠입하여 광복회의 취지를 설명하고 13원 90전을 모집하였다. 군자금 모집 확충을 위해 1917년 12월 9~10일경 인천 연락 거점에서 김한종과 모여 대책을 논의하였다. 그 자리에서 충청남도 내 우재룡이 중국에서 발송한 부호 외의 자산가에게도 경고문을 발송하여 모집 대상을 확대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1918년 1월 김한종이 작성한 ‘고시문(告示文)’에 주의사항을 추가하여 100여 통을 제작하였다. 이것을 가지고 김재창, 임봉주(林鳳柱, 이명 임세규(林世圭))와 함께 서울로 가 1월 20일, 21일 양일간 남대문, 종로 등지 우편함에 넣어 전국 각지로 발송하였다. 또한 우재룡이 발송한 포고문 수령자들에게도 “저번에 발송한 포고문은 이미 수령하였을 것이니 비밀을 지키고, 배당금을 준비하여 본 회원의 요구를 기다려 교부해야 한다. 본회의 군율(軍律)은 분명하니 생명을 스스로 포기하는 폐단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적은 지령장을 발송해 군자금 출연을 독려하였다. 충청남도 홍성군 금마면(金馬面) 김영두(金永斗)에게 20,000원, 보령군 청라면 이석구에게 100,000원 및 이외 충청남도 자산가 18명에게 각 발송하였다. 부호에 대한 직접적인 무력 사용도 감행하였다. 1918년 1월 23일경 천안역 인근 이강헌(李康憲)의 집에서 김한종, 임봉주, 김경태와 함께 군자금 징수의 임무 수행과 불응시 무력을 사용해 2~3명을 처단할 것을 논의하였다. 처음 광복회의 포고문을 헌병에 넘긴 것으로 추정되는 충청남도 온양(溫陽)의 이기상(李起相)을 대상으로 삼았으나, 그 집을 헌병이 경계하고 있어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이때 김한종이 “도고면장 박용하(朴容夏)는 통고문을 받았으면서 이를 헌병에게 넘긴 일이 있을 뿐만 아니라 부하 면서기 가족을 결식하게 만들었고, 또 전 면장을 옥사시킨 악인(惡人)이다. 광복회에 찬성하지 않고 또 의연금을 내놓지 않으니 동인을 죽여 다른 사람을 위협하자”고 하자 동의하여 임봉주, 김경태에게 박용하 처단을 지시하였다. 권총 2정을 받은 두 사람은 같은 해 1월 24일 오후 7시경 아산군 도고면(道高面) 신유리(新柳里) 박용하의 집에 잠입하여 사형선고문을 전달한 후 총격, 처단하였다. 부호들에게 포고문과 고시문 등이 계속 발송되자 일제 경찰은 촉각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대한광복회가 발각되면서 1918년 1월 말 천안 성환(成歡)에서 체포되었다. 이때 김한종을 비롯한 박상진, 채기중(蔡基中), 김경태, 임봉주, 유창순, 장두환, 김재창, 김재풍 등 대한광복회 회원 37명이 체포되었다. 1919년 2월 2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살인, 방화, 강도, 총포화약류취체령 위반 등의 혐의로 사형을 받았으나, 1919년 9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10년으로 감형되었다. 그러나 옥고를 겪던 중 1921년 감옥에서 사망하였다. 사망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으나 수감 중에도 투쟁을 전개하여 일제 헌병에 의해 비밀리에 살해되었다는 설이 전해진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박경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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