林永善
永善1919. 1. 19 ~ 2000. 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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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애족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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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919년 1월 19일 함경남도 장진군(長津郡) 중남면(中南面) 사수리(泗水里)에서 태어났다. 1944년 학도지원병으로 함흥의 43부대에 입대하였다가 이윤철(李允喆)·태성옥(太成玉)을 규합해 병영에서 탈출하였고, 한국의 독립에 힘쓰기 위해 독립군과 합류하고자 하였다. 서울 경신학교(儆新學校) 재학 당시 교사로 있던 도상봉(都相鳳)·김건(金建) 등으로부터 경신학교 선배 중 김규식(金奎植)·안창호(安昌浩) 등이 독립운동에 종사하였다는 사실을 들은 후 독립운동에 투신해야겠다는 결심을 하며 신체를 건강하게 단련하였다. 시국에 관한 이야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손기정(孫基禎) 등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저항적인 언동을 하다가 경찰서에 수감되었다. 1941년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예과에 진학한 후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참여할 목적으로 말타기를 익혔는데, 이로 인해 도쿄(東京) 경찰의 요시찰 대상이 되어 감시를 받다가 스기나미(杉並) 경찰서에 구금되기도 하였다. 1943년 11월 임시정부의 광복군에 가담해야 할 때가 되었다는 판단하에 도쿄-서울-평양-만주 펑톈(奉天)을 거쳐 만리장성 고북고(古北古)를 통과하던 중 일본군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1944년 1월 펑텐에는 독립군에 참여한 독립지사들이 신분을 위장한 채 비밀연락기관을 운영하고 있다는 정보를 접하고 서울에서 포섭한 조선형(趙旋衡)과 함께 이에 대한 접선을 시도했으나 평안북도 정주(定州)에서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이후 입대를 조건으로 석방되어 함흥 43부대에 배치되었다. 일제는 1941년 태평양전쟁 이후 전황이 어려워지자 ‘전시교육’이라 칭하며 학생을 각종 노역에 출동시키는 한편 병역의 유예를 철폐하였다. 1943년 10월 20일에는 이른바 ‘조선인 학도 육군 특별지원병제도(朝鮮人學徒陸軍特別志願兵制度)’를 발표해 ‘자발적인’ 학도병을 모집하였고, 각계의 친일 인사들을 종용해 학생들이 학도병으로 지원할 것을 설득·선동하도록 하였다. 함흥의 육군 43부대에는 함경남·북도 출신의 학도병들이 주로 입대하였다. 1944년 1월 20일 4,385명의 학도병들과 함께 육군 43부대에 입대하였다. 입대한 직후부터 30여 명의 학도병을 상대로 동지를 포섭하며 일본군 부대에서 탈출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그 과정에 이윤철·태성옥을 포섭하였다. 이후 3개월에 걸쳐 탈출과 행군에 필요한 장비를 각 중대에서 훔쳐 부대 내의 산중에 묻어 두었다. 그리고 투쟁 방향을 “1. 생자필멸(生者必滅)이니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죽기로 하자, 2. 탈출 목적은 이전에 접선하려던 독립군 접선을 다시 실행하기 위한 것으로, 만주 통화현(通化縣) 반석(盤石)으로 가 접선을 다시 시도한다, 3. 탈출 자체가 항일운동이다.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으로 친일이 판을 치는 것 같은 현실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는 일제에 대해 행동하는 저항을 보여주어야 한다.” 등을 다짐하며 의거 기회를 노렸다. 1944년 6월 2일 함흥 43부대 탈출에 성공하였으나, 태성옥·이윤철이 행군 대열에서 이탈한 가운데 이윤철의 자수로 계획했던 북진 행로가 밝혀지면서 장진군 신남면(新南面) 한신주(韓信柱) 집에서 붙잡혔다. 1944년 7월 17일 평양 육군군법회의(陸軍軍法會議)에서 징역 4년 6월을 받았다. 일본의 규슈(九州) 오쿠라육군형무소(小倉陸軍刑務所)에서 옥고를 겪던 중, 1945년 8월 15일 광복으로 귀환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김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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