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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수만

全守萬

1882. 11. 28 ~ 1942. 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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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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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안성(安城)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기도 안성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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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82년 11월 28일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원곡면(元谷面) 칠곡리(七谷里)에서 태어났다. 전기선(全起先)이라는 이명을 사용하였다. 향리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4월 1일 안성군 원곡면과 양성면(陽城面)에서는 두 지역 주민들의 연합으로 대대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만세운동의 가장 대표적인 만세시위 중 하나로 평가받는 이 연합 만세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만세운동에 대한 무력진압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조선총독부가 만세시위 참여자들에게 이른바 내란죄의 적용을 시도했을 정도로 매우 격렬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원곡면과 양성면의 연합 만세시위는 원곡면 칠곡리의 이유석(李裕奭)과 홍창섭(洪昌燮), 외가천리(外加川里)의 최은식(崔殷植)과 이희용(李熙龍)·이근수(李根洙), 내가천리(內伽川里)의 이덕순(李德順), 죽백리(竹栢里)의 이양섭(李陽燮) 등의 주도로 시작되었다. 이유석·홍창섭 등으로부터 4월 1일 오후, “오늘 밤 모두 면사무소 앞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이라는 계획을 전달받고, 그 취지에 크게 공감하여 만세시위 참여를 결의하였다. 이병문(李丙文)·이병오(李丙五)·이상근(李相根) 등의 마을 주민들과 함께 이날 저녁 면사무소로 갔다. 외가천리에 위치한 면사무소 앞에 1,000여 명의 원곡면 주민들이 집결하였다. 이들과 함께 이유석·홍창섭·최은식 등의 지휘에 따라 큰 목소리로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 과정에서 이유석 등의 주도자들은 면장 남길우(南吉祐)와 면사무소의 직원들을 면사무소 밖으로 끌어내 그들에게 태극기를 쥐어주고 ‘독립만세’를 외치게 하였다. 그동안 주민들에게 위압적으로 행동했던 면장과 면사무소 직원들이 저항하지 못하고 만세를 외치는 모습을 보고 시위의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만세시위 분위기에 크게 고무된 이유석·홍창섭 등 주도자들은 시위대를 향해 일제의 경찰주재소와 면사무소, 우편소 등이 위치한 양성으로 가서 그곳의 주민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하자고 외쳤다. 1914년 안성군으로 통합되기 전까지 과거 양성군에 속한 지역이었던 원곡면과 양성면의 주민들은 서로 간의 동향의식이 매우 높았다. 양성면 주민들과의 연합 만세시위 계획에 크게 고무되어 다른 주민들과 함께 시위대열을 형성하여 횃불을 밝혔다. 시위대의 선두에 면장 남길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연창하면서 양성면을 향해 행진하였다. 시위대가 원곡면과 양성면의 경계인 성은고개 정상에 도착하자, 주도자들은 행진을 멈추고 집회를 개최하였다. 시위의 분위기를 재정비하면서 시위대가 휴식을 취하기 위함이었다. 이유석·홍창섭·이덕순·이근수·최은식 등은 휴식 중인 주민들 앞으로 나와 “한국은 이미 독립하였다. 이제 주재소·면사무소 등 일제의 통치시설은 필요 없다, 지금부터 양성으로 가서 주재소 및 우편소, 그 외 일본인의 집을 불태우자”는 등의 내용을 연설하여 주민들을 격동시켰다. 주도자들의 연설에 크게 공감하여 주변에서 돌멩이와 몽둥이 등을 주워들고, 다시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양성면을 향해 행진하였다. 이날 밤 양성면의 주민들도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오후 9시경부터 수백 명의 주민들은 동항리(東恒里)에 위치한 경찰주재소 앞에 집결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있었다. 성은고개에서 양성면의 만세시위 모습을 확인하고 곧바로 내달려 양성면의 만세시위대와 합류하였다. 2,000여 명의 규모로 확대된 시위대와 함께 더욱 열정적으로 ‘독립만세’를 연창하며 일제 경찰의 주재소에 대한 공격에 참여하였다. 만세시위대의 선두에서 최은식·이병렬(李炳烈)·이규완(李圭完)·한응교(韓應敎) 등과 함께 주재소를 향해 돌을 던져 유리창을 파괴하는 등 투석전을 전개하였다. 다음 목표인 양성우편소로 행진하여 돌을 던져 우편소의 유리창을 깨뜨렸다. 이후 평소 지역에서 원성이 높았던 일본인 도자토(外里與手)와 고리대금업자 다카(隆秀知)의 집으로 쳐들어가 가구와 기물 등을 파손시켰다. 양성면의 곳곳에서 4월 2일 새벽까지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한 후 원곡면으로 귀환하여 원곡면 면사무소를 향해 돌을 던지는 등의 마무리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새벽 4시경 해산하였다. 일제는 4월 3일 경찰이 아닌 조선주차군 제79연대 소속 30여 명의 병력을 원곡면과 양성면으로 파견하여 만세시위 참여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 색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최초 내란죄의 혐의로 고등법원의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은 “만세운동은 소요죄를 구성할 수는 있어도 내란죄를 구성할 수는 없다”라고 판결하고, 경성지방법원을 관할법원으로 지정하여 돌려보냈다. 이에 대해 8월 10일 경성지방법원이 “본 건 공소를 수리하지 않음”을 선언함에 따라 실제 재판은 만세시위로부터 거의 2년이 지난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진행되었다. 이 재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및 소요죄, 건조물 소훼죄 등으로 징역 2년 6월을 고받아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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